큰일 났다. 나는 요즘 글태기가 오고 말았다. 글태기가 뭐냐면… 글쓰기 + 권태기를 합쳐서 내가 만든 말로, 글 쓰는 데에 권태기를 느끼고 있다는 말이다. 글을 매주, 늦어도 2주에 1번은 올리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주 글을 쓰니까, 글 쓸 거리도 점점 떨어지고 “내가 제대로 된 글을 쓰고 있는 건지” 의심이 갈 정도로 글이 제대로 써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좋아하는 일이 [해야 하는 일]이 된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원하는 삶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버는 것.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좋아하는 일(디자인)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재밌어하는 일(마케팅 디자인)에 대해 온전히 자리 잡아가는 것 역시 오랜 시간이 걸렸다.(프로덕트 디자인이나 브랜드 디자인처럼 별도의 이름이 있지 않아서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을까 걱정했더란다) 10년까지는 할 수 있을까, 5년 이후에는 다른 디자인으로 전향해야 하나 걱정하게 했던 마케팅 디자인으로 13년 가까이 돈 벌어먹고 있으니 내 입장에서는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자발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글 쓰는 것, 그림 그리는 것 등의 [창작 활동]을 좋아한다. 아무런 생각 없이 무언가를 만들고 손을 뽀짝대는 것을 좋아한다. 한때 취미 키트를 사서 라탄, 마크라메 등을 해보고 나서 더욱 확실해졌다. 글쓰기 역시 나의 창작 활동 중 하나였는데, 평소에 블로그에 여행 후기나 어디 다녀온 후기를 쓰던 나는 가벼운 글보다는 무게감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 내가 원래 자신 있어했던 [글을 쓰는 것]. 글쓰기는 또 다른 나의 습관이 되었다.
나는 브런치 스토리를 시작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마침 글을 쓰기 시작하고 최근 몇 년 사이에 나의 커리어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던 시기였다. 내가 그동안 했던 고민들을 그저 머릿속에 떠다니다가 사라지게 하지 않게끔 시작한 것이 브런치였다. 블로그는 나의 [가벼운 글쓰기]를 위한 창구로 남겨두고 좀 더 무게감 있는 글을 브런치에 남겼다. 브런치에 올린 글을 나름 홍보하기 위해 링크드인에도 글을 쓰기 시작했다. 브런치 글을 좋게 봐주신 분들 덕분에 위픽레터에도 매주 브런치의 글이 올라가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여기저기 글에 대한 반응이 올라오고, 봐주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꾸준히 글을 올려야 하는 습관이 더욱 강해진다. 1주일에 1번은 글을 써야 하는 압박 아닌 압박이 들어오고, 글로 쓸 만한 글감이 점점 줄어든다. 물론 웹툰 작가님들처럼 세이브원고처럼 브런치 [저장글]에 몇 가지 대제목+소제목만 써놓고 저장해 놓은 글이 몇 개 있기는 하지만… 글감이 계속 떨어지니 뭔가 했던 말을 또 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처음 글을 쓸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내가 쓰는 글의 맥락을 볼 수 없다. 마치 의식의 흐름대로 쓰고 그냥 올리는 느낌? 물론 나는 글을 쓰자마자 바로 업로드하는 타입이 아니라 2차, 3차로 한번 더 보고 그제야 업로드를 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N차로 수정하고 다시 나 스스로 글을 읽었을 때에도 이 글의 큰 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왜지, 대체 뭐가 문제인거지…. 심지어 1개의 글이 아니라 그 뒤로 올리는 2,3번째 글들도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나는 단순히 내가 하는 글쓰기가 [해야 하는 일]이 되어서 익숙한 환경과 주제로 의무감에 글을 써버리는 상황이 되어서 글태기가 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고 싶은 이유
글태기가 오고 나서 잠시 글쓰기를 쉬어야 하나 생각이 들기도 했다. 1주일에 1번씩 쓰던 글을 잠시 한 달 동안 쉬어볼까. 아니야 차라리 글 올리는 주기를 조금 늘려볼까? 2주에 1번씩? 잠시 글쓰기를 쉬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았다. 꾸준히 글을 올리고 그 글을 통해 내가 느낀 바를 쏟아내는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글을 쓰지 않는다면 나는 주말마다 유튜브나 게임만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글쓰기는 나에게 인스타에 올리는 피드와 같은 존재다. 내가 인스타에 올리는 피드로 [내가 00에 갔었다], [내가 00을 먹었다]라는 생존신고를 하는 것처럼 글을 통해서 디자이너 HYO의 생존신고를 하고 있다. 특히나 브런치-링크드인-위픽레터(-서핏 또는 인스타)로 이어지는 글 플랫폼 또는 sns의 연계성 때문인지 글 하나를 쓰면 여기저기 나 이런 디자이너인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자연스럽게 알릴 수 있는 효과(?)가 있다.
예전에 읽었던 [서른의 불만 마흔의 불안](조소현 저, 어크로스) 책에서 본 글인데, A선배가 심혈을 기울여 진행한 프로젝트를 다른 사람들이 A선배가 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B직원이 했다고 생각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상황을 보니, B는 자신이 참여했던 그 프로젝트에 대한 것을 SNS에 꾸준히 올리고 알렸더니 사람들이 A선배가 아닌 [이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한] B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고 글을 놓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디자이너는 다른 직군에 비해 이상하게 폐쇄적인 직군이다. 타사 디자이너와의 커뮤니티가 잘 없고, 본인이 작업한 서비스의 디자인에 대해 얘기하는 경우가 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 프로젝트(온전히 디자이너만 진행하는 수주 프로젝트 등을 제외하고)를 진행하고 나서는 [이 디자이너가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는 얘기를 듣기 어렵다. 대부분 개발자, 기획자, 마케터가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런 얘기들 속에 디자이너가 빠진 데에 대해 분개하는 디자이너들도 많이 봤다.
결국 디자이너가 [저 프로젝트의 디자인은 내가 담당했다]고 알리는 것도 중요한데, 나는 그 역할을 [글]이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변에 내 글을 보는 동료 디자이너들도 이러한 글의 중요성을 알고 글로 우리들의 얘기를 꾸준히 써줄 것을 종종 얘기해 준다. 나는 현재 브런치나 링크드인 등에서 [시니어 마케팅 디자이너]로 글을 쓰고 있는데, 이런 역할로 포지셔닝을 할 수 있는 데에 글쓰기가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처럼 자주까지는 못 쓰더라도 꾸준히 쓰려고 노력하려 한다. 지금처럼 1주일에 1번씩까지는 아니더라도 2주에 한 번이라도… 어차피 브런치 스토리 글쓰기 알림이 2주일 이상 쓰지 않으면 글 올리라고 압박(?) 알림이 오긴 하니까. 물론 했던 말을 또 하는 듯한 반복되는 글쓰기에 지칠 때도 있겠지만, 컨퍼런스나 새로운 툴을 찾아 배우면서 글감을 채우면 되니까. 만약 지금까지 올리는 글이 거기서 거기 같은 느낌을 받았다면, 이 글을 보고 HYO가 글태기가 와서 그렇구나, 앞으로 좀 더 나은 글을 쓰려고 노력은 하는구나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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