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 ego. 챗 지피티에서는 (요즘 너무 자주 의지하는 분이라 민망하다)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에고”는 심리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자아의 일부로서 자기의 정체성, 자아의식, 현실감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에고가 강한 사람, 이라고 말하면 흔히 자기중심적이거나 자기표현이 강한 사람을 떠올린다. 단어 자체의 의미는 자아의 “일부”로서 자기의 “정체성” “자아의식” “현실감”이라고 하니, self centered, 즉 자기 “중심적”이라는 뜻은 에고라는 단어의 뜻 자체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자아의식”이라는 것 자체가 자기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통상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인지 ‘넌 에고가 강한 것 같아’라고 하면 그다지 칭찬으로는 들리지 않는다. (넌 자기중심적이야 란 말을 세련되게 하는 느낌이랄까)
사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쓰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정확하게는 “에고이스트”라고 할 수 있다. (챗 지피티도 그렇게 정의하는데, 자꾸 복붙 하면 좀 부끄러우니 궁금하신 분들은 챗지피티에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90년대 샤넬 향수 “에고이스트”가 왠지 이런 에고이스트의 특징을 잘 비주얼화 한 것 같다.
이쯤에서 “에고이스트” 90년 광고 한 번 보고 가실게요.
내 안의 거대한 자아와 싸우는 멋진 나 자신.. 이런 느낌?
“에고이스트” 말고 “에고”로 다시 돌아와 보자. 사전적 의미 그대로 “자아의식” 그리고 “현실감-주변 현실과 연결되는 나에 대한 의식”. 이 정의를 놓고 보면, 요즘처럼 대중적으로 자아의식이 핫했던 때가 있었나 싶다. 90년대, 2000년대 초반엔 주로 기업 (그것도 좀 선진적인 기업들)들에서 리더십 트레이닝 때나 받을 수 있었던 MBTI. 한국이 하도 MBTI로 난리인 걸 알고, 한국 출장 오기 전 준비 사항 중 하나로 MBTI 테스트를 받고 자기소개에 포함했던 프랑스 동료도 있었다.
자신의 MBTI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지경에 이르자, 이젠 피로해졌는지 MBTI 과몰입러들이 눈총을 받고 있기도 하지만, MBTI 가 시들해질 때쯤 또 다른 “에고 분석 툴”이 뜰 것임은 분명하다.
왜 이렇게 모두가 “자기의식”에 빠지게 된 것일까? 기업에서 MBTI 테스트를 진행할 때에는, “나는 이런 MBTI이니 나와 일할 땐 조심하세요”라는 자기 방어로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대 금물 사항이다!), 우리 팀원들의 MBTI 구성을 알고, 협업 시 어떻게 일할지, 프로젝트 팀원을 꾸릴 때 팀원들의 성향을 어떻게 참고할 것인지 그아먈로 “참고”만 하라는 것이고, MBTI 활용의 방향성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나 이러니까 니들이 이해해”가 아니라.
그런데 MBTI 활용의 행태를 보면 ‘나는 F 라 감수성이 예민하니까 나한테는 말조심해 줘’ ‘나는 I라 연락이 잘 안 될 때도 있으니 이해해 줘’ 이렇게 ‘나’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에 많이 사용되고 있으니, 그야말로 ‘에고’들의 대파티가 아닌가 싶다. 서로 대화하는 파티가 아닌, 서로 자기 할 말만 하는 그런 파티 말이다.
약간 이런 느낌? 나 자신에 흠뻑 취한 느낌?
그러니까, 에고들이 만나서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에고이스트”들이 되는 것이라고 할까?
여러 단계의 면접을 보고 회사의 컬처핏까지 보면서 들어온 사람들이 모인 집단인 “회사”에서도 이 “에고”들이 나만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들이 모인다 해도 소통 불능의 조직이 될 것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레떼루”가 좋고, 회사에서 해 주는 물질적, 소속감적 대우가 높고 특권이 많을 경우 (이를 두고 entitlement라고 한다) 소속원들은 “나의 에고”에만 집중하게 되는 현상이 더욱 큰 것 같다.
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에는 돈이 많이 몰렸던 투자은행들이나 경영컨설팅 펌들의 직원들에게 이런 entitlement 현상이 두드러졌는데, 예를 들어 XXX 만 삭스, XX 린치, X켄지 이런 곳의 명함을 들고 간지 나는 슈트 (아르마니 슈트가 기본 – 엠포리오 아르마니 안됨, 조지오 아르마니 이상이어야 함. 내 연봉이 이 정도는 입고도 남는다는 능력의 상징.)와 차가운 미소를 장착하면 내가 가는 어느 곳에서든 대접을 받았다. (이런 곳들은 명함도 심플하게 흰 바탕에 타임스 로만체의 검은 폰트가 전부.)
이런 느낌? 무슨 무슨 소셜 클럽 회원이기도 해야 함.
요즘은 이런 entitlement 현상들이 MAMAA (Microsoft, Amazon, Meta, Apple and Alphabet) 같은 빅테크들 위주에서 보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반박 시 님 말씀이 전적으로 맞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저만의 편협된 생각입니다)
90년대 investment banker 들처럼 뭔가 “갖춰진 틀”을 오히려 깨부수는 것이 더욱 잘났고 멋진 것이다, 뭐 이런 느낌의 entitlement라고나 할까?
연봉은 수억 대 (또는 수십억 대이지만)이지만 나는 후디를 입고 (근데 그 후디가 essential 후디라 8-90만 원..) 스니커즈를 신고 (한정판) 회사 로고 박힌 배낭을 메고, 나의 색깔을 드러내는 타투를 하고, 환경을 위해 전기차를 타거나 공유 이동 서비스를 이용하는, 그런 똑똑하고 유능한 데다 의식마저 있는 나 자신. 뭐 이런 느낌. 게다가 MAMAA에 다닌다고 하면 다들 “와우”라고 해 주고, 또 이런 회사들은 “우리 조직원들은 지적인 능력뿐 아니라 훌륭한 감정적 역량까지 갖춘 우수한 분들 뿐입니다. 왜냐, 그런 분들만 채용하기 때문입니다”라고 직간접적으로 얘기하고 있으니 (실제로 이런 사람들의 분포 비율이 다른 회사보다 높은 것도 사실이고) 더욱 “나는 특별해”에 몰입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entitlement”가 적어도 그 조직 내에서라도 건강한 자긍심과 협력의 근간으로 사용된다면 좋으련만, 인간의 속성이란 우수하고 열등하고를 떠나, “경쟁”이 “협동”보다 먼저라고 한다. (이건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어떤 학자 분이 하신 말씀을 봤는데 제가 지금 출처를 못 찾겠습니다…)
검증된 인력들만 모였다는 조직에서 모두가 ‘나의 에고’만 내세우면, 골로 가거나 정치력이 우선되기 십상이다. 다들 똑똑하다 보니 회의 때마다 의견들을 내려고 할 것이고, 길어질 것이고, 그런데 그 의견들을 정리하고 실행을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때에는 “나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건 나의 r&r 이 아니니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라고 피해 버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수 있다. 실행의 영역은 머리를 쓰는 고차원적인 일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에 훌륭한 인력인 내가 딱가리를 할 수는 없다는 에고가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내가 하는 일이 너무나 중요하고, 다른 사람의 일은 덜 중요하다”는 에고이스트의 끝판왕으로 가게 되면 조직의 방향은 산으로 가게 된다. 회사란, 비즈니스란 하나의 사업을 이루는 큰 물줄기 (또는 큰 라인이라고 해야 할까?)를 여러 부서/조직들이 물꼬를 트고, 둑을 쌓고, 댐을 지어서 잘 흘러가도록 해야 하는 것인데, 내가 지금 열심히 삽을 뜨고 있는 둑이 뭐에 쓰이는지도 모른 채 둑의 미학적 설계에만 집중하는 조직원이 정말 똑똑한 일류 조직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이 둑을 쌓기 전에 저 동료는 어떤 일을 해서 내가 이 둑을 지금 쌓아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둑을 잘 쌓고 나면 그다음 동료는 이 둑으로 뭘 하는지를 파악하고 계속 소통하면서 내가 도움을 받을 때도, 그리고 도움을 줄 때도 있는 – 한마디로 조직 안에서의 나의 역할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줄 아는 그럼 사람들이 진정한 “일류 탤런트”가 아닐까.
오늘은 제목을 빌려 온 책, “ego is the enemy”의 이미지를 마지막으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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