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허기를 재촉하는 듯한 냄새가 흘러왔다.
복도 가운데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 문을 열어보니 가벼운 조식이 마련된 공간이 있다. 토스트와 간단한 음료가 제공된다는 것을 하루가 지나서야 알았다. 전날 오후부터 내린 비는 아침 내내 끊임없이 내린다. 보름 전쯤 확인한 이곳 날씨는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비켜 갔으면 했던 태풍이 결국 이곳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그 덕에 바로 밖으로 나갔을 시간에 따뜻한 커피 한 잔에 끊임없이 유리창에 달라붙는 빗방울을 바라볼 시간을 벌었다. 언제나 그칠까. 떠나기 전에 해를 보기는 할까.
눈앞으로 책장 들어왔다. 처음에 그냥 의례적인 공간인가 생각했다. 다시 둘러보니 공간을 분리하면서 세워둔 책장에 있는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을 둔 가족들이 같이 둘러앉을 수 있는 공간도 한쪽에 있다. 벽 쪽 선반에는 그림책들이 놓여 있다. 그림책을 한 권 펼쳐 봤다. 무슨 그림책일까. 구글 렌즈로 제목을 해석하고, 본문 내용을 이해했다. 번역된 책이 있는지, 저자 이름을 검색도 해봤다. 책 장에 놓인 이 책들은, 호텔과 책방이 협업해서 만들어 놓은 공간이다.
책 좋아하는 나에게 반가운 공간이다. 진즉 좀 올라 와 볼 걸 그랬다. 이틀이나 지나서야 알아챈 것이 좀 아쉬웠다. 책장에 꽂힌 책을 빼, 이 책 저 책을 넘겨봤다. 구글 번역으로 어떤 내용인지 찾아보고 관심 있는 주제는 작가 이력을 더 찾아봤다. 일본의 디자인회사에서 광고 크리에이터로 일하는 분이 쓴 책이다. 아이디어를 어떻게 만들고, 그 아이디어를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작가의 중심적인 사고는 ‘여백’이다.
이 책, 한 번 내가 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직 번역이 안 된 책이다. 얼마나 팔릴지는 모르지만. 천천히 읽어볼 만한 책이다. 우연히 만난 책 한 권이 나의 마음을 뛰게 만든다. 잠시 옛날 생각이 났다.

뭐 하나 급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모든 부서에서 빨리 해달라고 마감 시간을 재촉했다. 그렇게 일을 하는 동안 답답한 마음이 들 때면, 인천공항행 리무진 버스를 탔다. 평일 낮 시간대 버스는 늦지 않게 시내를 벗어난다. 여행객 속에서 어느새 나도 출국을 앞둔 여행객의 마음이 된다. 짐 하나 없이 공항에 도착해서는 분주하게 가방을 끄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여행을 앞둔 사람들처럼 설레는 마음을 잠시나마 가져본다. 그렇게 잠시 머물다 자신감을 충전하고 다시 제자리로 복귀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하면 자동판매기처럼 툭툭 튀어나오면 좋겠지만, 아이디어라는 게 어디 그런가.
하던 일에서 벗어나야 무엇을 해야 할지 떠오른다. 갇힌 공간에서는 늘 해오던 방식을 벗어나는 게 쉽지 않다. 인생은 여행이라는 말은 시집 속에만 있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생각이 흐르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생각은 흘러야 하고 마음도 흘러야 한다.
네모 안에 갇힌 생각은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한다. ‘가짜’ 여행객이 아닌, 그런 마음으로 타이베이에 왔다. 다만, 습기가 많아 잘 오지 않는 여름이라는 계절에. 거기에 태풍 영향권까지 겹친 상황에 놓인 도시에 말이다.
나의 바람과 달리 밀려온 태풍으로 관광보다는, 나를 위해 ‘여백’을 만드는 시간을 가졌다. 타이베이 외곽에 있는 숙소, 시내 중심보다는 다소 떨어져 있지만 이용한 분들의 만족도도 좋고, 가성비도 괜찮았다. 잠이야 조금 불편하면 어떤가.
선택이 가끔 틀릴 때도 있지만, 이번에는 잘 맞았다. 거기에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책 한 권을 만났다. 머물러만 있었다면 알 수 없었던 일, 여행은 여백을 만드는 일이고 우연을 만나는 과정이다.
그렇게 조식코너 공간에서 만난 책 한 권 덕에, 출국 전날 저녁에도 계획에 없던 곳을 찾았다. 일본에 갔을 때는 가보지 못했는데 타이베이의 한 백화점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츠타야서점을 찾았다. 출판 경향이나, 이곳 사람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고 싶었다. 이 책 저 책 찾아보고, 좀 더 무슨 책인지 궁금한 것은 구글 렌즈로 검색도 했다. 그때 서점 직원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No, photo.”
직원에게 검색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분 눈에는 사진을 찍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나라도 그렇게 봤을 것 같다. 여기서 책 한 권을 또 그렇게 만났다.
천천히 들여다보면, 우연을 만난다. 나는 그게 참 좋다. 뭔가 풀리지 않은 일이 있다면, 계획한 일이 제대로 앞으로 가지 못한다면 억지로 끌고 갈 이유가 없다. 잠시 다른 길로 새는 것도 방법이다. 그럴 때는 마음에 휴식, 여백을 만들어주자. 여백은 디자인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좀 더 멀리 가기 위해 인생에 여백을 선물하자.
*이 글은 월간에세이 2025년 2월호(통권 454호) ‘이달의 에세이’에 실린 글입니다.
길윤웅님의 더 많은 콘텐츠를 보려면? 👉 https://brunch.co.kr/@jumj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