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는 디자인 실무를 안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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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디자이너가 이제 막 들어왔을 때, 내가 디자이너가 아닌 줄 알았대. 내가 디자인 업무한 걸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과거 내가 팀장님에게 들은 말이다. 한 디자이너가 이제 막 들어왔을 때, 디자인 조직의 팀장님이 디자이너인 줄 몰랐다는 에피소드를 얘기해 주셨다. 당시에 팀장님은 직접 디자인을 하기보다는 팀원들이 진행하는 업무 디렉팅을 하거나 팀 매니징을 하고 있었다. 디자인 업무를 하는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않다 보니 들은 말이었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조직 또는 프로젝트의 대장을 맡은 사람은 알 것이다. 디자인 조직 리더는 디자인 실무가 주 업무가 아니라는 것을. 


디자인왕인줄 알았는데

내가 바로 이 구역의 정리왕?


현재 나는 꽤 오래 진행할 프로젝트의 실무 대장을 맡고 있다. 리드가 별도로 있긴 하지만, 팀장님들이 리드를 하고 있다 보니 실무자를 이끄는 [대장] 역할을 내가 하고 있다.(리드와 실무자 사이에 낀 사람 같긴 한데…) 아직 프로젝트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내가 도맡은 업무를 한번 나열해 보자면 아래와 같다.


– 프로젝트 위키 생성해서 정리하기. (실무자들이 위키에 기록할 수 있게 양식 만들기, 수정사항 반영하기 등등)
– 매주 정기 위클리 회의 일정 잡기. 필요시 실무자들끼리의 회의 추가로 잡기.
– 회의 진행할 때마다 회의록 작성하고 공유하기.
– 리드 팀장님들 피드백 듣고 내용 파악 후 다음에 해야 할 거 빠르게 정해놓기


이렇게 적어보니 대부분 업무들이 [정리]하는 업무다. 문서 정리, 일정 정리 등등등. 현재 맡고 있는 프로젝트가 이 결과를 어떻게 정리하고 배포하는지도 중요하게 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다. 물론 실무도 중간중간에 하고 있지만, 실무에서 내가 맡은 역할의 비중은 적은 편이다. 나 외의 디자이너들이 실무를 비중 있게 하고 있으며, 심지어 훨씬 잘한다.


그러다 보니 참 애매하다. 리더는 별도로 있고, 나는 실무 대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고. 지금 이렇게 정리만 하고 일정 잘 맞춰주는 비서(???) 같은 역할이 맞는 걸까? 실무 대장이라고 하는데 실무를 해야 하는 걸까 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본격적으로 대장 역할을 하려면 실무를 병행하려다가 둘 다 놓칠 것 같고…. 그러다 보니 내 주요 역할은 무엇일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팀장님과의 1 on 1에서 이렇게 내 역할을 정의했다.


“대장의 역할을 맡았다면 그 역할이 메인이 되어야 해요. 실무자들의 리드 및 서포트를 메인으로 가져가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실무는 서브 업무로 생각해요.

대신에 실무자들이 다른 업무랑 병행하면서 업무량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때 HYO님이 실무를 서포트하면 되고요.

만약에 이 역할에 대해 디자이너가 의문을 제시할 것 같다면, 미리 디자이너들에게 [나 이런 역할하겠다]고 얘기하는 것도 좋아요. “


이 얘기를 한 이후에 조금 마음이 편해졌달까. 이후에 나는 기록-정리-공유하는 업무를 메인 역할로 가져가고 있다.(덕분에 회의 전후로 제일 바쁘다) 실무도 함께 하긴 하지만 크게 비중을 두고 있지 않다. 결정은 리드 팀장님들이 해주고, 나는 이 결정에 대한 다음 과제를 제시한다. 현재는 실무를 하고 있지만 일정에 따라 실무를 지원하는 역할에 가깝다. 가능하면 실무는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맡기려 하고, 나는 그에 대한 피드백과 응원을 제공한다. 한마디로 “내가 이 구역의 정리왕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 아직 갈길이 구만리고 처음 진행하는 방식의 프로젝트라서 다들 많이 헤매고 있지만, 적어도 정리 잘하고, 이 내용을 토대로 실무 하는 디자이너들이 갈팡질팡하지 않게 방향을 잡아주고 + 결정하고 + 응원해 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내가 또 느낀 점이 있다. 디자이너마다 성향이 다를 수 있겠지만, 생각보다 디자이너들이 자료를 모으고 제대로 정리해서 공유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메인 업무가 디자인 작업이다 보니, 이를 잘 분류해서 + 보는 사람이 잘 이해할 수 있게 정리하고 + 말과 글로 공유하는 업무를 힘들어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보통 이런 [정리]하는 업무는 디자이너 경력이 어느 정도 된 사람들에게 요구하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디자인 퍼포먼스 스킬이 쌓이면, 이 디자인을 정리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할 줄도 알아야 한다. 혼자 일하는 사람이라면 혼자 다 할 줄 알아야겠지만, 만약 조직 단위로 일한다면 이 역할은 주로 리더가 맡게 된다. 그렇게 리더는 이 구역의 정리왕이 될 수밖에 없다.


조직 또는 프로젝트의 리더는

실무와 리드의 비중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까?

생각해보니 비슷한 고민을 작년 초 즈음에도 했던 것 같다. 당시의 나는 시니어 디자이로서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참고 브런치 글 : 내가 기대하는 10년차 이상 디자이너의 역할) 역시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지난번과 내용이 같아보이지만 이번에는 이 시니어로서의 역할과 디자인 실무의 비중에 대해 고민했다.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비교적 규모가 있는 디자인 조직에서는 리더가 실무보다는 그 외의 업무를 한다. 리더에게 요구하는 역할은 주로 [팀이나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역할(이는 디렉팅, 매니징도 포함)]이기 때문에 실무에 비중을 줄일 수밖에 없다. 물론 리더 본인도 디자인을 하고 싶고, 실무에 대한 욕심이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두 가지 모두 잘 할 수 없다. 두 가지 모두 잘하는 능력자도 있겠지만… 자칫하면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물론 조직의 사정상 실무와 리딩 모두 해야 하는 눈물나는 상황도 많다)


내가 [리더를 맡았을 때 실무와 리딩의 비중]을 한번 더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흑백요리사] 중 팀전(고기 파트) 에피소드를 볼 때였다. 갑자기 언제 적 흑백요리사??라고 하겠지만, 그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에피소드였다. 실제로 이 에피소드가 오픈된 이후 커리어 관련 아티클에서 관련 내용이 많이 언급되었다. (플렉스 블로그에 언급된 해당 에피소드 관련 아티클 링크)


개인적으로 이 에피소드를 봤을 때, 흑수저와 백수저 팀의 움직임과 진행 과정이 확연히 달라 보였다. 백수저 팀에 더 명성이 있는 셰프들이 팀을 이뤘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갈팡질팡했다. 메뉴 구성을 어떻게 할지, 어떤 가니쉬를 내놓을지 공유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유명한 셰프들이 서로 헤매고 갈등을 빚었다. (방송 편집이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리더를 맡은 셰프님이 이 상황을 제대로 중재하고 방향을 지정해서 공유해야 하는데, 제대로 된 역할을 보여주지 못했다. 백수저 팀은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았다.


출처 : 넷플릭스 유튜브 클립(https://www.youtube.com/watch?v=ZVDE3dzSObw)

반면 흑수저 팀은 인상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트리플스타가 리더가 되었는데, 어떤 메뉴를 할 건지 바로 결정하고, 각 셰프별 역할을 분담해 주었다. 정말 좋았던 지점은, 트리플스타도 실력 있는 셰프인데 본인이 직접 요리하지 않고 한 발 뒤에 물러나서 다른 셰프들의 요리를 도운 것이다. 다른 셰프들은 이 방향에 따라서 행동한다. 테이스팅 단계에서도 빠르게 피드백을 내리고 셰프들은 이를 수용한다. 트리플스타는 전면으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방향성 제시, 서포트, 그리고 피드백(+칭찬과 응원)을 주는 역할을 했다. 해당 팀전의 결과는 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누구나 예상할 결과였다.


지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나는 이 흑백요리사의 팀전, 그리고 과거에 경험했던 팀 단위의 프로젝트 진행 과정을 떠올렸다. 완전 처음 진행하는 프로젝트라서 리더도 헤맸던 적도 있었고, 서로 어떻게 정리할지 몰라서 나중에 업무 공유할 때 부문장님한테 신나게 혼난 적도 있었다. 이때 리더는 어떤 역할을 해야 했을까. 이끄는 사람은 이 프로젝트에서 어떻게 일해야 이 일이 잘 진행될까. 실패한 것, 성공한 것, 심지어 이런 미디어 예능을 통해서도 프로젝트에서의 리더의 역할을 고민하게 된다.


시니어 디자인인데 실무할래 리딩할래? 라고 질문이 들어온다면, 사실 답은 없다. 하지만 만약에 프로젝트를 이끄는 디자이너라면, 실무보다는 리딩에 비중을 더 크게 두라고 하고 싶다. [실무자들이 실무를 잘 수행할 수 있게 잘 서포트]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실무에서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디자이너들도 방향성이 잘 보이지 않는 프로젝트에서 헤매기 십상이다. 좀 더 넓은 시각으로 프로젝트를 보고 실무자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과제를 수행할 수 있게 이끄는 것이 리더가 해야 할 일이다. 


실무와 리딩의 비중을 조절하는 것은 만약에 지금 프로젝트 하나를 이끌게 된 디자이너가 이 글을 본다면, 과연 내가 이 프로젝트에서 어떤 역할을 가져가야 할지, 실무와 리딩의 비율을 얼마나 조정해야 하는지 고민해 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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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터와 제일 가까이서, 제일 오래 함께 일한 디자이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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