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직업의 의미를 바꿔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과거 컴퓨터(computer)라는 단어는 기계를 뜻하지 않았습니다.
‘compute(계산하다)’에 ‘-er’가 붙어, 계산을 수행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직업명이었습니다.
복잡한 계산을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하는 능력이 필요했던 시대, 그 역할은 분명 사람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기계가 그 역할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컴퓨터’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닌 기계 그 자체를 의미하는 명사로 바뀌었습니다. 직업은 사라졌고, 단어의 의미마저 전환되었습니다. 요즘 들어 이 이야기가 유독 자주 떠오릅니다. 지금의 마케터 역시 비슷한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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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의 발전은 단순히 효율을 높이는 수준을 넘어, 마케터의 역할 자체를 재정의하고 있습니다.
카피를 쓰고, 이미지를 만들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심지어 전략의 초안까지 제안하는 AI를 마주하다 보면 ‘어디까지가 우리의 영역일까’라는 질문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대체되는 영역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반복적인 리서치, 형식적인 보고서 작성, 성과와 크게 연결되지 않는 회의와 정리 업무들. 우리는 그동안 ‘일을 하고 있다’는 감각을 위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소모해왔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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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AI는 마케터의 일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졌던 ‘가짜 노동’을 걷어내는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겉으로는 바쁘지만 실제 성과와는 거리가 있는 일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던 산출물들, 혹은 굳이 사람이 하지 않아도 되는 반복 작업들. 이런 영역들이 AI에 의해 빠르게 대체된다면, 남게 되는 것은 오히려 더 본질적인 일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고객을 이해하는 일, 시장을 해석하는 일, 그리고 결국 ‘왜 이 메시지가 전달되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일. 조금 아이러니하게도,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마케터는 더 인간적인 역할에 가까워질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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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변화는 낭만적이지만은 않습니다.
가짜 노동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진짜 실력’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시간과 노력으로 어느 정도 메꿀 수 있었던 영역들이 이제는 더 이상 변명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AI가 대부분의 실행을 빠르게 처리해버린다면, 결국 남는 차이는 판단과 해석, 그리고 방향성이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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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동시에 더 중요한 사실은, 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새로운 역할을 만들어낸다는 점입니다.
컴퓨터의 등장으로 사라진 직업보다, 컴퓨터를 활용해 새롭게 생겨난 직업이 훨씬 많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술의 방향이 아니라 그 기술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일 것입니다.
AI를 위협으로 바라볼 것인지, 아니면 가장 강력한 도구로 받아들일 것인지. 변화의 초기에 있는 지금은 누가 더 뛰어난가보다, 누가 더 빠르게 흡수하고 활용하는가가 결과를 좌우할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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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AI에게 ‘대체되는 존재’가 될 것인지, 아니면 AI를 활용해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용자’가 될 것인지.
과거 ‘컴퓨터’라는 단어가 사람에서 기계로 넘어갔듯, 지금 ‘마케터’라는 단어 역시 새로운 의미로 재정의될지도 모릅니다.
그 변화 속에서 우리가 어떤 위치에 서 있을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그 흐름의 끝에서 우리는 이전보다 덜 바쁘지만 더 중요한 일을 하는 존재가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조금은 덜 분주하고,
조금은 더 본질에 가까운 방식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