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마케터 season2

[오늘부터 마케터]


prologe.






인사팀에서 보낸 2년.
그리고 오늘, 층수가 바뀌었다.


18층이 아닌 8층.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조금 낯설었다.

숫자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심장은 전혀 다른 이유로 뛰고 있었다.


8층. tvM.


문이 열리기 전까지
나는 괜히 사원증을 한 번 만져보고,

셔츠 대신 조금 더 캐주얼하게 입은 피케셔츠의 옷깃도 한 번 정리했다.


복장이 조금 달라졌다고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건 아닐 텐데,

이상하게도 오늘만큼은 그런 사소한 것들이 다르게 느껴졌다.



처음 맡는 층의 공기.

복도에는 프로그램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어딘가에서는 회의하다가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는 급하게 뛰어가고,

누군가는 커피를 든 채 무언가를 빠르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인사팀의 공기가 정리와 조율, 숫자와 문서의 리듬으로 흐르는 잔잔한 클래식이었다면

이곳의 공기는 훨씬 즉흥적이고, 소리가 크고, 생동감이 있는 일렉 같았다.


나는 생소하고 낯선 소란 속에 잠시 멈춰 섰다.


드디어 왔다.
내가 원하던 곳에.


그 순간에는 정말 그렇게 믿었다.
이제야 내가 바라는 자리에 도착했다고.






tvM 마케팅팀의 첫인상은 예상과 조금 달랐다.

좀 더 화려하고, 모두가 감각적인 말을 쏟아내는 곳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다들 바쁘고, 훨씬 현실적이었다.

윤정아 팀장님은 인상부터 남달랐다.
털털하고 말은 짧았지만, 이름과 숫자들을 이상할 만큼 정확하게 기억했다.
누군가 무심코 던진 말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을 사람 같았다.


이미 동호회에서 익숙하게 보아 온 이우람 대리.

일할 때는 현장 냄새가 가득했다.
말보다 몸이 먼저 튀어나가는 사람같이.

“인후님 잘 왔어요. 나중에 현장 한번 같이 가시죠. 직접 보면 빨라요.”


해맑은 얼굴의 하우정 사원.

그녀의 자리를 채운 다양한 인형과 노트북에 붙어 있는 다양한 스티커들. 마치 세상의 온갖 재미들을 저장해 두고 사는 사람 같았다.
첫날부터 짧은 영상을 하나 보여주며 말했다.


“이 영상 보셨어요? 지금 다들 이걸로 난리 났어요. ㅎㅎ”


저 구석의 박춘 과장.

까무잡잡한 피부에 수염. 회사원이라기보다는 이자카야에서 등장할 것 같은 인상. 무표정에 말이 없는 모습. 오히려 그 무심함이 묘한 내공처럼 느껴졌다.
의자에 기대앉은 채 나를 한 번 보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처음이시라고..? 같이 잘해봐요.”


팀 사람들의 캐릭터가 다 달라 보였다.

개성들이 하나같이 뚜렷했다.


그날 첫 회의는 더 낯설었다.

10명이 넘는 팀 사람들이 모여 치열한 회의를 했다.


프로그램 이야기가 오갔고, 누군가는 시청률을 말했고, 누군가는 온라인 반응을 이야기했고, 누군가는 광고와 편성 일정을 함께 꺼냈다.
말은 빠르게 흘러갔다.



“이번 OOH는 어디까지 노출되죠?”

윤 팀장님이 펜을 돌리며 날카롭게 상황을 짚으면


“스팟 추가하면 예산이랑 구좌 다시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박춘 과장이 의자에 기댄 채 무심하게 말을 했다.


“코어 타깃 쪽 반응 먼저 잡아야 할 것 같아요.”

항상 실행이 앞서는 우람님이 치고 나갔고,


“현장 스틸 B컷에서 다시 빼고, 이번 드라마 인스티즈 바이럴 포인트 다시 정리할게요.”

우정님이 휴대폰 화면을 두드리며 덧붙였다.


“편성 바뀌었어요! 스크롤 수정해야 해요.”

빠른 속도로 시간이 흘렀다.


나는 조용히 노트를 펼쳤다.


OOH.
스팟.
코어 타깃.
인스티즈.

바이럴 포인트.
편성.

스크롤.


다들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질문을 하나 던지면 다른 단어 셋이 따라 나왔고, 그 셋을 겨우 적고 있으면 또 다른 말 다섯 개가 지나가버렸다.


나는 대부분이 모르는 내용들이었다.


무슨 뜻이지.
이건 또 뭐지.
이건 내가 아는 그 뜻이 맞나.
아니면 여기서는 전혀 다른 뜻으로 쓰는 건가.

묻고 싶었지만, 다들 너무 당연하게 알아듣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나만 다른 나라 말 듣는 사람 같았다.


일단 적었다.

뜻을 모르더라도, 지금은 놓치지 않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회의는 계속 흘러갔다.
내 손은 바빴다.
프로그램 이름, 사람 이름, 낯선 용어, 누가 어떤 맥락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나중에 다시 찾아봐야 할 것들.


정신없이 받아 적다 보니
노트 한 페이지가 금방 찼다.


첫 회의에서 내가 한 일은 도움 되는 의견을 내거나 좋은 아이디어를 보태는 게 아니었다. 그저 모르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미친 듯이 메모하는 것뿐이었다.


온갖 내용으로 노트가 가득 차 있었다.

그걸 보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부끄럽기도 했고, 동시에 새로운 변화가 새삼 와닿기도 했다.


아, 나는 이 세상에 처음이구나.


같은 회사 안에 있었는데도
여기는 전혀 다른 언어를 쓰는 세계 같았다.

하지만 나는 빈손으로 온 게 아니었다.


인사팀에서는 조직을 움직이는 방식을 배웠다.
숫자로 사람을 보고, 문서로 상황을 정리하고, 보이지 않는 흐름을 읽는 법을 조금씩 익혔다.


그리고 동호회에서는 또 다른 걸 배웠다.

사람을 모으는 법.
사람들이 왜 움직이는지, 무엇에 반응하는지, 함께하게 만드는 분위기를 만드는 법.


인사팀에서 배운 숫자의 무기,
기타 동호회에서 배운 사람을 모으는 법.


그 두 가지가 언젠가는 이 낯선 세계에서도 쓰일 거라고, 막연하게 믿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서 정말 잘해보고 싶다고.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첫걸음이 내게는 돌아서 돌아온 기회였다.
그만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빠르게 흩어졌다.
누군가는 다음 미팅으로 뛰어갔고,

누군가는 출연진 반응을 확인했고,

누군가는 방금 회의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다시 붙잡고 있었다.


회의실에 혼자 남자 나는 아까 적은 노트를 다시 들여다봤다.

알아듣지 못한 말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낯선 단어들 사이로 내가 급하게 그어놓은 밑줄과 동그라미가 유난히 많았다.

그 노트 한 장이 지금 내 위치 같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에겐 너무 익숙해서 설명조차 필요 없는 것들.
그런데 나에게는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것들.

그 아래에 나는 한 줄을 더 적었다.


'내 이름으로 된 일 하나 해보기'


그 문장을 적고 나서야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다.


사실 그때의 나는 단순했다.

마케팅팀으로 오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고, 그러면 막연하게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원하던 부서에 왔으니 자연스럽게 나다운 모습이 나올 거라고도 믿었다.


아마 누구라도 처음에는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좋아하는 일 앞에서는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원하던 세계에 들어가면 덜 흔들릴 거라고.

그날의 나는 분명 설렜다.


아침에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때의 8층과 회의가 끝나고 노트를 덮을 때의 8층은 같은 숫자였지만, 조금 다른 무게였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정말 마케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몰랐다.


마케터가 된다는 건
단지 부서가 바뀌는 일이 아니었다.


자존심이 긁히고,
마음이 무너지고,
사람에게 배우고,
사람 때문에 흔들리고,
새로운 세상을 배우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좋아하는 일 앞에서 자존심이 긁힌다는 것도,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 때로는 가장 불편한 사람이 된다는 것도.



오늘부터 마케터.


나는 내가 원하던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으로 시작을 했다.




<슈퍼마케터, 오늘부터 마케터> 계속.


슈퍼마케터 첫화부터 보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