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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말이 있기에 감각과 지각을 넘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 대상이나 경험을 말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코가 긴 동물을 보고 ‘코끼리(코길이)’라고 이름을 짓죠. 나아가 식물이나 동물처럼 여러 대상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말도 만들 수 있습니다. 때론 추상적인 말을 만들어 여러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 ‘우주’ ‘인생’이라는 말은 다양한 경험이 축적된 추상적인 말입니다. 추상적인 말은 은유를 통해 자유롭게 의미가 부여됩니다. ‘인생은 마라톤’ 혹은 ‘인생은 전쟁터’처럼요. ‘인생’이라는 말은 추상적이어서 마라톤도 되고 전쟁터도 될 수 있습니다.
윤여경, 『아름. 다움,』
어제 서울 한복판에 얼룩말이 나타났습니다. 얼룩말의 이름은 세로. 세상에 태어난 지 삼 년 남짓이라는 얼룩말이 동물원을 탈출해 세 시간 반 정도 도심을 누비다가 주택 골목에서 생포되었습니다. 마취에서 깨어나 다시 동물원에서 세로는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요. 기대와는 다른 너무 많은 것들과 마주한 한바탕 꿈 뒤에 초원을 향한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을까요.
저에게 초원은 추상적인 말들이 뛰노는 곳입니다. 그것은 심상이라는 바탕과 은유라는 붓질 없이 탄생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초원을 시로써 내미는 일은 흥미롭습니다. 사랑, 우주, 인생과 같은 추상적인 말들을 세계관을 지탱하는 기둥으로 세워 두고 다소 미련스럽게 이것저것을 올려보다가 덜어내는 시도도 무용하지만 삶을 살아가는 데 이런저런 도움을 주었습니다.
구독자 님이 진심 어린 눈길로 지켜볼 수 있는 추상적인 말은 어떤 것일까요. 얼마 전에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요즘 들어 사랑을 언급하는 시가 너무 많다는 토로를 했습니다. 사랑 노래처럼 사랑 시가 많은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죠. 그럼에도 저에게는 특징적인 현상으로 와닿았어요. 그것은 저 또한 그 말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반증이겠죠. 아닌 척했지만 그런 말은 너무 크고 부담스러워 함부로 다룰 수 없다 이야기하면서 중요한 걸 놓쳤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그 말에 주목하고 썼는지 신경쓸 시간에 그냥 제 식대로 그 말을 마음에 풀어 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요.
한동안 함축하는 일에 익숙해지다보니 외연 또한 확장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다가 제 안에 놓인 말들이 눈치를 보며 뛰놀지 못하는 현실에 처하다 보니 다시금 초원을 향한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저는 올해 함부로 사살하지도 생포하지도 못하는 사랑의 움직임을 따라가다가 시 한 편을 쓰는 게 꿈입니다. 다작을 하는 것도 목표로 세웠지만, 그 한 편을 쓰게 된다면 언젠가 첫 시집을 계약할 때 강박을 떨치고 쓴 시들을 한데 엮을 수 있을 것 같기에. 그때까지 구독자 님이 주목하는 추상적인 말들에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면서 이 레터와 세상에 나온 몇 권의 시집을 찾아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여력이 되는 분들은 아래 추신의 내용을 살펴봐주시길요.
추신, 안녕하세요. 만물박사 김민지입니다. 말도 없이 정말 오래 쉬고 돌아왔어요. 그 사이에 저는 퇴사를 했고요. 퇴사하고도 2주 동안 건강이 좋지 않아 몸과 마음을 돌보다가 이제야 나타났습니다. 구독자 님은 잘 지내셨나요. 앞으로 남은 삼월의 마지막 주는 올해 단행본으로 출간될 에세이 원고 마감을 위해 온전히 쓸 예정이라 사월까지 기다려주십사 이 한 편의 레터를 들고 왔습니다. 한동안 야근으로 번복한 편집자님과의 약속을 꼭 지키고 돌아올게요.
🌸 추가로 이 레터를 쓰기까지 몇 가지 소소한 계획들이 생겼는데요. 그중 하나가 ‘시작을 위한 시간’이라는 프로그램입니다. 평온을 사랑하는 당신의 안식처, 피스 카인드 홈의 제안으로 4월 10일부터 9주간 소수의 분들과 시를 쓸 선물 같은 기회가 생겼습니다. 이번 기회에 저와 함께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드셨다면 아래 버튼을 눌러 신청 부탁드립니다.
만물박사 김민지의 더 많은 생각이 궁금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