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딩 에이전시와 클라이언트의 협업에서
각자의 탁월함은 프로젝트의 성과를 보장할 수 있을까?
브랜딩 에이전시에서의 수년동안 많은 클라이언트를 만났다. 브랜드를 운영하는 오너에서, 글로벌 대기업의 책임자와 임원, 그룹 총수까지 주고받은 명함이 700장을 넘었다. 그들 다수는 업계에서 탁월한 성과를 증명했고 이미 시장을 선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에이전시에 브랜딩을 의뢰하는 까닭은 브랜딩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가 높기 때문이다. 이때 전문성이 검증된 브랜딩 에이전시와 뛰어난 성과를 만든 기업이 협업하는 경우, 좋은 결과를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브랜딩 프로젝트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바로 클라이언트의 협업 역량이다. 이것은 클라이언트의 탁월한 전문성, 출중한 사업적 능력과는 조금 결이 다른 덕목이다.
물론 클라이언트의 입장에서 보면 에이전시의 자질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큰 예산과 소중한 시간을 투자하는 만큼 기대하는 성과를 위해서는 실력이 검증된 에이전시를 선정해야 한다. 클라이언트들의 표현을 빌리면, 브랜드를 기획하는 전략에서 감도 높은 디자인까지 완성도 있는 브랜딩 역량을 지닌 국내 에이전시는 드물다. 대부분의 에이전시는 디자인 역량이 출중한데 브랜드에 비전을 제시할 능력이 없거나, 브랜딩 전략이 뾰족하지만 디자인 감도가 무딘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이런 의문이 든다.
과연 최정상급 에이전시와 일을 한다고 해서 프로젝트의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사실 그렇지 않다. 국내 최정상으로 평가받는 브랜딩 에이전시조차 클라이언트사 임원진을 설득하지 못하고 몇 개월 내내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다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비극을 겪는다. 물론 비극은 클라이언트와 에이전시 모두에 해당한다.
01.
시작은 각각의 전문성이지만
결과의 차이는 협업 역량에 달렸다.
©lufthansa
브랜딩 프로젝트에서 협업의 전제는 전문성이다. 업계 1위 기업의 마케팅 부서를 이끌고 있는 임원들, 아마존과 엑손모빌 등 글로벌 기업의 마케팅 책임자들, 젠틀몬스터 미국법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구글을 비롯 글로벌 빅테크 기업과 경쟁하는 모빌리티 전문가들, 기아 신규 CI 시스템 개발 담당자, 글로벌 마케팅 대행사의 프로페셔널 등 브랜딩 에이전시에 프로젝트를 의뢰한 그들은 이미 업계에 자신의 역량을 증명하고 최고의 커리어를 만들고 있는 전문가들이다. 브랜딩 프로젝트에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브랜딩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입증해야 한다.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는 역량은 그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파악하고 브랜드적 맥락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전문성을 말한다. 다양한 카테고리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브랜드 기획, 전략, 버벌 브랜딩, 브랜드 디자인에 이르는 브랜딩의 모든 과정에서 나는 전문가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역량을 증명해 왔다. 또한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과 함께 피드백을 주고 받으며 그들의 접근법을 배우고 업무 영역을 확장하는 성장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협업 역량이 브랜딩 프로젝트의 성과에 미치는 영향을 피부로 체감했다. 외부 컨설턴트인 내가 마치 내 사업을 진행하듯 프로젝트에 열정과 애정을 다하게 만드는 클라이언트가 있는 반면, 거듭되는 진행 과정에서 프로젝트의 목표는 물론 당위성조차 모호하게 만드는 클라이언트도 있었다.
브랜딩 전문가와 클라이언트의 협업에서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핵심 역량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서로의 전문성에 대한 존중, 그리고 목적 지향적 태도이다.
02.
전문성에 대한 상호존중이
브랜딩의 탁월함을 극대화한다.
©Real Madrid
삼성 그룹의 총수였던 이건희 회장은 ‘1명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로 탁월한 전문가 개인의 역량을 강조했다. 이는 브랜딩에도 적용된다. 최고 수준의 전문가 1명이 평범한 수준의 전문가 20명이 만든 결과물을 압도하는 경우는 있어도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브랜딩에서의 탁월함은 전적으로 전문가의 인문학적 소양과 지식, 풍부한 서사력, 밀도 높은 경험, 감각, 통찰력에 비례하기에 평범한 수준의 전문성으로는 아무리 많은 인력을 투자해도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만들기 어렵다. 예컨대 기아의 리브랜딩 프로젝트에 20명의 담당자가 참여했다면 뛰어난 전문가의 경우 혼자서 브랜딩의 A에서 Z까지 모든 영역을 하나로 관통하는 수준 높은 맥락을 만들 수 있다. 최고 수준의 브랜딩 전문가는 브랜드 가치에서 비전, 페르소나, 브랜드 아이덴티티, 슬로건, 스토리텔링, 디자인 시스템, 커뮤니케이션 콘텐츠에 이르는 모든 브랜드 자산을 고유한 맥락 속에서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문제는 시간과 효율이다. 브랜드 경쟁력에 있어 시간은 언제나 중대한 변수로 작용한다. 참여 인원과 브랜딩의 퀄리티는 비례하지 않지만 동등한 능력치를 지닌 전문가가 여럿이라면 같은 시간 동안 브랜드에 대한 입체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하나의 맥락 속에서도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고, 개인의 주관에서 물러나 최선의 결과에 대한 객관적인 해석이 가능하며, 진행 과정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난관에 빠르게 대응하며 목표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혼자서는 돌파하기 어려운 상황도 각각의 전문가들이 지닌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면 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이 팀워크의 힘이다.
축구 경기를 보면 뛰어난 재능을 지닌 스타플레이어 한 명이 경기를 승리로 이끄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에게 결정적인 패스를 건네는 팀원이 없다면 어떨까? 전략을 전개하는 것은커녕, 경기의 진행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브랜딩 프로젝트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클라이언트와 에이전시, 각각의 전문가들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스포츠 경기와 같다. 무엇보다 참여한 전문가들 간의 패스 플레이가 중요하다. 이때 패스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상대의 전문성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다.
©Real Madrid
이상적인 팀은 서로의 포지션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이를테면 브랜딩 전문가들은 프로젝트 초반의 짧은 시간 내에 해당 산업과 브랜드 현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클라이언트사의 임원들과 마케팅, 사업부, 영업 등 각 분야의 담당자들이 관련 지식과 경험, 공동의 목표와 기대 성과를 충분히 공유하지 않으면 시간과 에너지 측면에서 비효율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단순 정보 공유 뿐 아니라 상대방이 역량을 발휘하도록 각자의 포지션에 맞는 역할을 적절한 시간 내에 해내는 일 또한 패스 플레이에 해당한다.
보통 프로젝트의 결정권은 임원진에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들의 역할은 플레이어보다 감독에 가깝지만, 그렇기에 그들과의 호흡 또한 중요하다. 어떤 임원의 경우, 열린 자세로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자신의 지식과 노하우를 통해 현황에 대한 해석을 공유한다. 그 과정에서 더 나은 해결책을 위한 적극적인 토의가 이뤄지고,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는 공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필드 위에 참여한 모든 선수들이 패스를 주고받기 적절한 위치로 이동하여 득점 확률을 높이는 축구 전술과 유사하다. 이런 능동적인 움직임은 효율의 개선은 물론 프로젝트의 잠재력까지 극대화하는 시너지 효과를 만든다.
반면 어떤 임원은 아예 패스를 외면하거나, 심지어 에이전시가 드리블하는 공을 빼앗는 일도 있다. 나는 이런 모습이 존중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존중이 없다면 상대방에 대한 신뢰도, 건강한 토의도 불가능하다. 상호존중이 없는 컨설팅은 그럴듯한 쇼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100의 성과를 낼 수 있는 전문가들이 협업해도 50이라는 초라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탁월한 협업은 개별 전문가들이 지닌 능력의 합이 100이라도 120, 150, 200의 성과를 만든다. 그런 탁월함은 팀원이 지닌 전문성을 존중했을 때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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