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기억난다. 내가 회의를 처음으로 [진행]했을 때가.
그때의 나는 정말 어리숙했다. 처음으로 한 서비스의 마케팅 디자인 리딩을 맡게 되어서 마음이 들떴고, 무엇보다 이 일의 경중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리딩을 맡은 후 처음으로 진행하게 된 미팅에서 나는 회의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 회의를 진행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그래서 이 회의에서 어떤 얘기를 해야 하는지 몰랐다. 말 그대로 폭망 했다. 함께 회의에 참여한 팀장님이 어찌어찌 이끌어줘서 회의는 마무리되었지만, 그때 팀장님은 날 어떻게 생각했을까??
미팅 진행을 신나게 말아먹고 나서야 이전의 미팅에서 뭘 잘못했는지가 확연히 보였다. 내가 그동안 미팅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구나. 다들 없는 시간 쪼개서 모인 건데, 진행하는 사람이 제대로 준비를 못해서 소중한 시간 낭비하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
누군가는 회의를 [참석]하기보다 [진행] 해야 한다
보통 회의를 진행한다면 실무자끼리만 모여서 얘기할 때도 있고, 리더들이 참여해서 리더들이 회의를 주관할 때도 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미팅을 제외하고는 실무 디자이너만 진행하는 미팅 같은 경우가 훨씬 많다. 우리끼리 시안을 보면서 얘기 나눠야 할 때, 부서장님 컨펌 전에 우리끼리 얘기를 맞춰야 할 때 등등.
이런 회의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이 바로 사회자, 즉 [진행자]의 역할이다. 사실 [진행자]라는 말은 내가 그냥 지어본 이름인데… 한마디로 내가 이 미팅의 MC가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갑자기 MC라고? 토크쇼도 아닌데?

100분토론을 생각해보자.(100분토론이라는 MBC 시사 프로그램이 있는데…. 아시나요? 참고로 이 글은 정치적 의도가 1도 없습니다) 정말 우리나라에서 엄청나게 오래된 시사 토론 프로그램인데, 하나의 주제로 2명 이상의 패널들이 각자의 의견을 어필하면서 논쟁토론을 벌이는 장이라 보면 된다. 오래된 프로그램인 만큼 그동안 수많은 사회자가 이 100분토론을 거쳐갔다.
이런 사회/정치 관련 주제로 토론을 하다 보면 사람들의 감정이 격양되기도 하고, 그러면 이 패널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논제가 흐려지기도 하다. 이럴 때 사회자가 상황을 정리하고 토론 진행을 매끄럽게 한다. 정해진 시간 내에 다양한 발언이 나올 수 있도록 발언 시간에 제한을 두고 넘어가지 않게 칼같이 자른다.(특히 손석희 전 앵커가 더 그랬다고 한다.)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은 사실 회의 때에도 필요하다. 예전에 디자인 부서 외에도 개발, 사업 등 다양한 부서에서 리더들이 한 번에 모여서 진행하는 위클리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리더들만 모인 곳에 왜 들어갔었지…?) 모두 C레벨 또는 리더들이었고, 날고 기는 분들이 대규모로 모인 미팅이었다. 이 미팅에서는 항상 회의를 진행하는 분이 있었다. 차분히 얘기할 것들을 순서대로 알려주셨고, 가끔 얘기가 다른 방향으로 새어나갈 때에는 방향을 바로잡아줬다.
개인적으로 원활한 회의 진행을 위해서, 엉뚱한 발상이 중요한 크리에이티브 관련 회의에서 진행자의 역할이 더더더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막연히 [아이디어를 생각해 보자]라는 회의가 있었는데, 이 회의에서 서로 좋은 아이디어를 내지 못해서 한동안 정적이 흐른 적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그 회의에서 이렇다 할 결과물을 내지 못해 다음 회의가 또 추가되었다. 차라리 이때 누군가가 “아직 다들 아이디어가 없는 것 같은데, 언제 몇 시 회의를 잡고 그때까지 생각해 오는 건 어때요?”라고 얘기했다면 어땠을까? 누군가가 이 정적을 깨고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할 일 없이 회의를 잘 진행했다면 어땠을까?
디자인은 말랑말랑한 일이다. 딱딱 맞춰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보니 정해진 프로세스, 정형화된 절차에 맞춰서 일하면 기발하고 독특한 결과물을 낼 수 없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어쩔 수 없다. 기한은 정해져 있고, 업무 진행을 위해서라면 말랑말랑한 업무라도 어느 정도의 절차에 맞춰야 한다. 그 절차 중 하나가 [회의]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 잡은 이 회의시간을 허투루 날릴 수 없다. 그래서 진행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회의를 진행하는 사람의 역할
내가 회의에 들어오는 사람을 참여자와 진행자로 나눴는데, 이는 내 주관에 따라 나눈 것일 뿐이지 공식적인 규칙은 아니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이끄는(매니징/디렉팅 등) 사람이라면 회의를 주관해야 할 때가 많아진다. 고경력자 또는 리더일수록 회의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글 서두에 얘기했던 것처럼 나 역시 피해 갈 수 없었다.
첫 회의 진행이 폭망한 이후로, 나는 짧은 회의라도 미리 내용을 준비하거나 회의 진행 중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참석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회의에 참석하기 전 나만의 To do list가 생겼다. 그 리스트 중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3가지를 공유하자면!
1. 이 회의의 목적을 명확히 기억한다.
– 회의를 진행하는 데에는 이유와 목적이 있다. 다들 바쁜 시간 쪼개서 모이는 건데, 이 회의를 통해 결론짓고자 하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회의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바에서 한창 벗어나지 않게 항상 참석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뭔가 잘못되었다! 싶으면 화제를 바로잡는다. 만약 계속 얘기해도 결론이 날 것 같지 않으면, 좀 더 생각할 시간을 주고 다음을 기약하며 회의를 빠르게 끝내자.
<디자이너의 상황에 대입해 보자면?>
보통 디자이너들은 작업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때, 그리고 여러 개의 시안 중 하나를 결정할 때 미팅을 진행한다. 이런 회의라면 [오늘 반드시 시안을 결정해야 한다!] 또는 [1차 시안보다 더 나은 2차 시안을 내기 위한 피드백을 듣는다!]라는 목적을 가지고 진행한다. 가끔 시안에 대한 피드백을 위 너무 디자인 디테일을 파다 보면 내용이 산으로 갈 수 있으니 이 부분을 주의하자.
2. 릴레이 회의(예 : 프로젝트 위클리)라면, 이다음에 뭘 해야 할지 Next step을 명확하게 지정한다.
– 서로 회의에서 갈팡질팡하게 되면, 이다음에 뭘 해야 하는지 모른 상태로 끝나버린다. 이는 프로젝트 업무를 진행할 때에 나와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그래서 다음 위클리까지 뭘 해오면 되나요?”라는 질문이 나왔을 때 명확하게 얘기할 줄 알아야 한다. 회의에 참석하는 실무자들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혼란을 느끼지 않도록 다음에 해와야 할 것을 얘기하고 회의를 끝내자.(과제가 없다면 없다고 명확하게 얘기해야 한다)
<디자이너의 상황에 대입해 보자면?>
이 2번 사항은 프로젝트 리드를 맡은 사람이 필수로 해야 하는 역할이다. 어떻게 보면 스케줄링과도 연관이 있는데, 정해진 기한동안 몇 번의 시안 제작과 컨펌을 거쳐야 하는지 미리 생각하고 “[언제]까지 이 시안으로 [이 피드백] 사항을 반영해서 디벨롭해 보자!”라고 다음까지 해올 것을 실무자에게 제시한다. 이런 과제 지시는 특히 주니어 디자이너와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에서는 필수다. 주니어 디자이너들은 프로젝트 진행 경험이 많지 않아서 명확한 제시가 있지 않으면 진행 과정에서 많이 헤맨다.
3. 회의 내용은 꼭 기록한다.
– 위의 1,2번을 진행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절차다. 회의에서 오간 내용을 알아야 이다음 회의 또는 앞으로 어떻게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뇌의 용량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회의가 끝나면 대부분의 회의 내용을 까먹기 쉽상이다. 정말 특출 난 기억력을 가진 게 아니라면, 회의를 진행하는 나를 위해서라도 회의 내용은 열심히 써두자. (진행하느라 정신이 없다면, 기록하는 사람을 지정해서 회의록을 작성하게 해도 된다. 의외로 회의록을 쓰고 정리하는 것도 회사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
<디자이너의 상황에 대입해 보자면?>
위에서 말했지만 디자인은 업무 특성상 말랑말랑한 일이라 회의 중에 툭 던진 사소한 말이라도 나중에 중요한 크리에이티브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나중에 “그때 그 회의에서 얘기 나온 거 있잖아! 그거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서 그때 나온 얘기를 끄집어내야 한다. 그리고, 나중에 리더 또는 유관부서 동료에게 “이런 피드백을 주셔서 이런 시안이 나왔어요” “이런 얘기로 결론이 나서 방향을 이렇게 잡았습니다”라고 나름의 방어(??)를 하기 위해서라도 기록은 꼭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회의를 진행할 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이 3가지다. 이 외에 다른 사항들도 있지만, 참석자들이 조금만 더 신경 써 준다면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부분이라서 [진행자가 가져야 할 태도] 3가지 정도를 추려서 적어보았다. 주관적인 To do list이지만, 혹시나 처음으로 프로젝트 리드를 맡아서 회의를 진행해야 하는 사람이 본다면 참고되었으면 한다.
작년에 제주도의 만춘서점에서 기쁜 마음으로 구매한 책이 있다. 김민철 작가님의 [우리 회의나 할까?]라는 책이다. 가장 치열한 곳에서 가장 신박한 아이디어를 요구하는 광고판에서는 회의를 어떻게 진행하는지 보여주는 책인데, 나는 이 책에서 회의를 기록하는 화자의 입장보다는 회의에 들어오는 [팀장님과 시니어들]의 역할에 집중했다. 다들 회의에 아이디어를 들고 왔는데 그 어떤 것도 만족스럽지 못할 때, 그리고 카피라이터들이 수많은 아이디어들을 툭툭 던질 때 이를 주도하는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까? 프로젝트 회의를 주관하는 일이 많아진 요즘, 이 책에서처럼 회의가 위대한 순간이 되게끔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가끔 열어보는 책이다.
단 30분 만에 끝나는 회의도, 1시간 이상 진행되는 회의도 어떻게 진행하느냐에 따라 쓸모없어질 수도 있고, 엄청난 소득을 얻을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내가 진행하는 회의가 위대하진 않아도 아주 작은 소득이라도 얻을 수 있는 장으로 만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진행해야 한다]. 비록 어제 진행한 미팅도 망한 각이 보이지만(눈물)… 이 글을 오늘 쓴 김에 내일 있을 회의에서는 좀 더 잘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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