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하지 않는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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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내가 직접 디자인하지 않는다. 시니어 경력이라 실무를 안 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그냥 우리 팀 자체가 디자인 실무를 메인으로 하지 않는다.

지난 봄 조직개편이 되어 조직명이 바뀌고, 조직에서 해야 하는 역할이 조금 달라지면서 나의 일은 배너나 페이지를 제작하거나 만드는, [디자인]하는 일에서 더 멀어졌다. 나 스스로도 정리하는 차원에서 얘기하자면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의 역할은 지금 아래와 같다.

– 마케팅 디자인(그리고 여기에 사용되는 그래픽 리소스 등) 작업이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시스템 만들기

– 마케팅 디자인 구좌에 대한 가이드 관리 및 안내

– 디자이너와 유관부서가 디자인 업무에 불필요한 시간을 소비하지 않도록, 프로세스 내에서 효율화 진행하기(슬랙, 위키 등등)

– 외주 관리 등등등

물론 연차가 높아지면서 아래 연차의 디자이너들을 돌봐주는 일을 점점 더 많이 하긴 하지만, 그 디자이너들의 업무도 배너나 페이지를 [만드는] 일보다는 가이드를 만들거나 시스템을 잡는 일을 더 많이 했다. 어느새 우리 조직은 [디자인]하는 팀보다는 [디자인하지 않는] 디자인팀이 되었다. (물론 간간히 디자인은 하지만, 예전만큼 메인 업무로 하지 않는다)


디자인하지 않으면 디자이너가 아닌 걸까?

이러한 팀의 메인 Role(역할) 때문에 조직개편 전후로는 꽤 혼란스러워했다. 아예 디자인을 놓으라는 건가? 난 앞으로 이 회사에서 디자인 작업을 할 일이 없어지는 건가? 조직개편 이후로 2달이 넘어가면서 그때의 내 고민은 좀 많이 앞서갔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도 나는 내가 직접 디자인하지 않는다. 시스템의 중심이 되는 구성요소별 마스터 컴포넌트를 디자인하긴 하지만, 심미성보다는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디자인을 하고 있다. 그동안 해왔던 디자인과 성격이 꽤 달라졌다.

팀의 역할을 듣고 위기감 또는 불안감을 느낀 이유는 아마도 팀에서 해야 할 역할이 [디자인 업무와 멀어 보여서] 일 것이다. 심미성(아름다운, 예쁜, 조형적으로 뛰어난)을 중심으로 결과물을 만드는 직업. 그동안 어도비 프로그램들, 피그마 등의 디자인 툴을 사용해서 퀄리티 높은 페이지나 배너들을 만드는 일을 주로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제부터 이 일을 하지 않을 거라고 한다. 그럼 나는 디자인을 안 하는 걸까? 디자인을 안 하면 나를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을까?

되게 1차원적으로 걱정한 지점은 바로 [커리어]였다. 이직할 때 내가 디자인 조직으로 지원하게 될 텐데, 그때 쓸 디자인 프로젝트가 이제부터 없다는 얘기다. 어찌어찌 포트폴리오에 잘 넣을 수는 있겠지만, 아직까지 마케팅 디자인 조직에서는 일러스트, 그래픽 퍼포먼스 등을 메인으로 보는 조직이 많아 보인다. 채용 공고를 찾아보면 당연하게도 주요 업무는 서비스(브랜드)에 잘 맞는 트렌드 한 디자인을 만들거나, 이런 디자인을 만드는 조직을 운영하는 일이다. 여전히 예쁘게 잘 만드는 디자이너를 요구하는 곳이 많다. 이런 현실 속에서 디자인하지 않는 지금의 내 상황이 맞는걸까? 얕게 생각하면 당연히 걱정될 수밖에 없다.


[디자이너]를 새롭게 정의해야 하는 순간일 수도 있다

그렇게 조직개편이 되고 나서, 나는 1달 리프레시 휴가를 보낸 후 개편된 조직에 합류했다. 적응하느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개편 전의 그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사라질 정도로 바빴지만, 그 와중에 가끔 링크드인이나 브런치 그리고 스레드에 올라온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디자이너의 미래]에 대한 글을 올린 것을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이다음에는 디자이너의 역할이 달라질 수 있겠다. “

“아니지, 디자이너랑 기획자(PM, PO), 아니면 마케터들과의 경계가 점점 없어질 수도 있겠네?”

AI라는 센세이션이 업계에서 큰 전환점이 되면서 업계에서는 내 일이 먼저 없어지네, 내 역할을 AI가 뺏아가네 등등 위기감을 드러내는 얘기가 많아졌다. 이는 디자이너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디자이너의 역할을 AI가 많이 하게 될 거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앞으로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사라질 수 있다고 얘기한다. 예쁘게 잘 만드는 일은 AI가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디자이너라는 직업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좀 오버다…라고 할 수는 있어도, 디자이너의 역할을 AI가 많이 할 거라는 얘기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는 더 이상 [예쁘게 잘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게 된다. 그러면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사라질까? 그건 아니다. 디자인의 개념을 넓혀서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일을 더 다양하게 정의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그동안 여러 글에서 얘기했듯이 AI가 예쁘게 잘 만들기 위해서는 메인 스타일과 가이드라인은 사람이 만들어야 한다. 어찌 되었든 디자인은 [감성과 사람의 센스, 그리고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좌우되는 분야이기 때문에 사람의 손길이 들어가야 한다. 이 손길이 [디자인하는 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AI가 예쁘게 잘 만들 수 있도록] 코어를 만드는 일은 디자이너가 할 수 있다.

우리가 [디자이너가 하는 일]이라고 정의하는 일 중 몇 가지는 AI가 대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존의 디자이너들은 내 일을 지속하기 위해 그 일 외의 디자이너의 역할을 찾아서, 또는 내가 지금 하던 일에서 더 범위를 넓혀서 일을 찾고 수행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는 지금 그 상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지금 당장 AI가 내가 하던 일을 대신하고 있진 않지만, 그때를 대비해서 디자인이 아닌 다른 일을 함으로써 내 디자이너의 역할을 지속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제일 꽂혔던 그 장면

예전에 조수용 대표님의 책 [일의 감각]을 읽었다. 주변 사람들이 너무 재밌게 읽었다고, 너도 이 책 읽으면 정말 공감 많이 될 거라고 해서 읽었는데 정말 좋은 책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 조수용 대표님의 인터뷰(최성운의 사고실험 인터뷰 영상 링크)도 봤었는데, 그 영상 마지막 부분에 갑자기 꽂혔다. [디자인]을 예로 들었지만, 일의 본질적으로 지향하는게 뭔지 파악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커뮤니케이션 하면, 본래 내가 하던 디자인이나 마케팅 등 1차원적인 업무들이 가볍게 보이고 내려놓기 쉽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을 당시의 나는 조직개편을 겪고 내가 더 이상 디자인을 하지 않는건가 혼란스러웠는데 대표님이 딱 그 얘기를 하신 것이다.

좀 더 생각을 넓혀보면 디자인을 더 큰 의미로 볼 수 있고,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

여기서 조수용 대표님은 디자인과 경영자의 관점에서 그 범위를 얘기했지만, 분야가 조금 다르더라도 그 동안의 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디자인]이라는 틀 안에서만 내 업무를 정의했을 수도 있다. 지금 우리 팀에서 하는 일은 기존 디자인에서 좀 더 범위를 넓힌 것 뿐인데, 아직 나는 생각이 넓어지지 못했구나 인터뷰를 보면서 많이 깨달았다. 앞으로 좀 더 디자인이라는 일을 더 넓게 바라보고 정의해야겠다며 책과 인터뷰를 통해 배웠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아직도 배너나 페이지를 직접 만드는 디자이너로 알고 있겠지만, 나는 디자인을 거의 하지 않는 디자이너다. 그렇다고 내가 디자이너가 아닌 것은 절대 아니다. [퀄리티 높은 결과물]을 디자인이라는 지식을 바탕으로 잘 만들게끔 시스템을 만들고 안내하는 디자이너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이런 나의 역할이 몇 년 후에는 또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디자이너인 것은 변함이 없다. 그 역할만 조금 달라졌을 뿐 내 일의 궁극적인 목표,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해 수행해야 하는 일들의 중심은 항상 같았으니까.

(글의 영상 캡쳐 출처 : 최성운의 사고실험,
네이버 최연소 임원이자 카카오 대표였던 디자이너 조수용의 ‘일의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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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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