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마케터 2장 마이크의 주인공



2.2 - 몸치의 리더






티 나게


“연말 장기자랑. 인후님이 해야지?!”


조대리가 내 자리 앞에 섰다.
말은 짧았고, 표정은 늘 그랬다.
권하는 말 같지만 이미 결론은 나있는 말.


“우리가 연말에 전 직원이 모이는 행사에서 공연을 하거든?

주니어들 모아서 한번 준비해 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제가요…?”

“응.”


끝이었다.
별다른 설명도 없었다.

제안이 아닌 통보였다.


“새로운 일 좀 해봐야지.

기획부터 알아서 하고 알려줘요.

이번에는 티 좀 나게. 알지?”


조대리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


그 순간 알았다.
이건 단순히 행사준비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미션이었다.


내가 다른 팀의 사람들과 어떻게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보여지는 무대.


티 나지 않게 지내야 하는 신입의

티 나야 하는 행사 준비.

잘한다고 돋보이지는 않지만

못하면 바로 티가 나는 그런 미션.


복도에서 tvM 팀장의 "괜찮았습니다"라는 칭찬과

조대리의 "티 나게 하지 말고"라는 경고를 동시에 받은 지 며칠이 지났다.


'튀는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일을 주어졌다.

그건 바로, 내 이름을 걸고 준비해야 하는 하나의 무대였다.





홍대 앞


일요일 오후. 홍대 앞 댄스학원.

문을 열자 거울 벽이 먼저 보였다.

형광등 불빛이 밝았다.


그곳에 JJ엔터테인먼트, 각 팀의 주니어 사원 10명이 모였다.


“일요일에 이걸 꼭 해야 돼요?”
“회사에서 춤추는 게 맞아요…?”


시작부터 툴툴거림이 나에게 쏟아졌다.

내가 시작한 자리가 아니었지만,

내가 모두를 모은 자리였으니.


“네. 일단, 다들 한 번 해보시죠. 잘 부탁드릴게요.”


맡겨진 만큼 잘 해내야 한다.

그곳의 춤선생님과 모두 함께

최종적으로 정한 것은 10명이

2개의 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보이그룹 1개,

걸그룹 1개.


단체 군무는 어느 개인만 돋보이지도,

어느 개인만 독박을 쓰지도 않는 딱 좋은 장치였다.


혼자 튀지 않으면서도,

아무도 숨을 곳이 없는 방식.


나는 이곳의 리더였지만
아무도 나를 리더로 보지 않았다.


나는 팀에서, 회사에서
‘말 많은 애’로 찍힌 상태였으니까.





굴욕


음악이 흘러나왔다.

2PM의 <Heartbeat>


심장 박동 소리와 함께 좀비처럼 걸어 나오는 특유의 도입부.

강사님이 말했다.


“자, 리더 분 앞으로.”


순간 발바닥이 굳었다.

거울 앞에 섰을 때 내 모습이 더 작아 보였다.


머리로는 비장하게 심장을 쥐어뜯고 있었다.

하지만 거울 속의 나는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오징어 같았다.

박자는 한 박자씩 늦었고 동작은 한 박자씩 어긋났다.

발은 항상 반 박자 뒤에 도착했다.

춤을 추는 내 모습이 낯설었다.

사실 태어나서 이제껏 춤이라는 걸 춰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그걸 ‘삐걱이’라고 불렀다.

뒤에서 누군가 웃음을 삼켰다.

내가 봐도 우스꽝스러웠다.


“잠깐만요.”


음악이 멈췄다.

강사님이 고개를 기울였다.


“리더 분 때문에 전체 대형이 무너지네요. 연습이 조금.. 많이 필요하겠는데요."


조금이라는 걸까. 많이라는 걸까.

내가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몸이 생각과 다르게 움직였다.


마치 나의 사회생활처럼.

나는 누가 봐도 삐걱이였다.


그것이 반복되자 등 뒤에서 누군가의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쳐다보는 주니어 사원들의 시선이 거울 너머로 꽂혔다.


거울 속 나는 애써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전혀 웃지 못했다.


예정된 시간보다

번번이 늦게 끝나야 했으니까.


나 때문에.






나홀로



다음 날 아침, 서버실의 문을 열었다.

에어컨 바람이 오늘따라 더 서늘했다.

선반에서 새 노트북을 꺼내려다 하마터면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윽.

어젯밤의 춤 연습으로 허벅지와 종아리가 찢어질 듯 욱신거렸다.

나는 차가운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사람 없는 조용한 서버실.

나는 그곳에서 투명인간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티 나게 하지 말고.”

조대리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맴돌았다.

나는 숨죽인 채, 서버실 구석에서 소리 없이 어젯밤의 스텝을 밟아보았다.


낮에는 기계들 사이에서 차갑게 숨을 죽이고,

밤에는 연습실에서 뜨겁게 허우적거리는 삶.

이것이 나의 첫 사회생활이었다.



2주차, 댄스학원.


여전히 춤은 엉망이었다.

잦은 실수로 강사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계속 여기서 박자가 밀리네요. 집중 안 해요?”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억지로 끌려온 주니어 사원들의 얼굴에 짜증과 피곤함이 번졌다.


그때, 나는 앞으로 나섰다.

“죄송합니다. 잘 맞춰놓겠습니다.


그날 밤 9시.

연습이 끝나고 사람들이 나간다.

나는 혼자 남아 다시 음악을 틀었다.


하나, 둘, 셋, 넷.

발이 꼬였다.

다시.


멈췄다.

몸이 따라오지 않았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때, 닫혔던 연습실 문이 살짝 열렸다.

지갑을 두고 갔던 해외영업팀 막내였다.

불 꺼진 연습실 구석, 홀로 같은 동작을 수십 번 반복하는 내 실루엣이 문틈으로 보였을 것이다.


나는 누가 온 줄도 모르고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그날 밤, 내 다리는 더 이상 내 다리가 아니었다.


낮에는 기계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일을 하는 투명인간,

밤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홀로 춤을 추는 댄서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무언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잠들지 않는 댄서


점심시간.


사람들이 쉬는 동안

나는 비상계단으로 내려갔다.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싸늘하고 삭막한 곳.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틀었다.

나의 몸짓과 함께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인후님?”


김과장님이었다.

한 손에 커피를 든 채로.


서글서글 웃는 게 인상적인

전략팀의 브레인이신 분.


“안녕하세요, 과장님.”

“뭐예요? 뭐 프로포즈 연습해요?”


나는 황급히 이어폰을 뺐다.


“아… 연말 행사요.”

“아하하. 난 또. 여기서 연습했구나?”


웃으며 김과장님은 말을 이었다.

"원래 회사에서 제일 못하는 애한테 리더 시키는 거 알죠? 쉽지 않을 텐데."


마음을 파고드는 농담.

나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나도 신입 때 해봤어요.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김과장님은 내 후들거리는 발을 보며 씩 웃었다.


“인후님, 근데 그거 알아? 일이나 무대나 똑같아.

리더가 가장 잘하지 않아도 돼. 대신 전체가 무너지지 않게."


내가 가장 잘하지 않아도 된다..?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강박이 흔들렸다.


과장님의 손에 들고 있던 커피 하나를 내게 툭 건넸다.


"지금 인후 씨가 잡아야 할 건 춤 박자도 있지만, 함께하는 사람들의 마음일지도 몰라.

힘들겠지만 끝까지 완주해 봐요. 보는 눈들이 많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회사 행사니까 와우 포인트 하나 꼭, 알지?"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어설픈 위로나 억지 격려가 아닌, 내 상태를 알아봐 주는 온기 있는 한마디였다.


“나도 그때.. 아니다."

말을 이으려다가 그대로 끊었다.

"끝까지 잘해봐요. 응원해요.”

그리고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받은 커피를 손에 쥐었다.

그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나의 속내가 ‘보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다시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틀었다.

과장님의 이야기가 머릿속으로 맴돌았다.


그때, 마지막에 무슨 말을 하시려 했던 걸까..?





레벨업


한 달이 흘렀다.

전 직원이 모이는 연말행사가 3일 앞으로 다가왔다.


학원, 비상계단. 밤 11시 거울 앞.

매일 같은 곳에서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처음엔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머리는 알고 있는데 발은 항상 반 박자 늦었다.


거울 속 내 얼굴은 웃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몸이 조금씩 따라오기 시작했다.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분명히 처음과는 달랐다.


"인후님, 이 동작 이렇게 하는 거 맞죠?"

누군가 내게 물었다.


"여기서 발 먼저요."

"오, 이제 좀 되시네요? 역시 리더!”

그 말이 마음에 기분 좋았다.


처음 이 자리에 왔을 때 시계를 쳐다보던 사람들이었다.

한숨을 쉬던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이 지금은 나한테 동작을 물어보고 있었다.


변화의 시작은 몇 주전, 그때부터였다.




'어떻게 하면 비전문가인 우리가 가장 빛나 보일 수 있을까?'

우리는 그것은 프로의 실력이 아니라, 신입의 위트였다.


몸으로 부딪히며 얻은 팁, 신입으로 꺼낼 수 있는 아이디어를 톡방에 정리해 올렸다.

의상부터, 개인 포인트별 포즈와 표정까지. 개개인이 각자의 순간에 가장 빛날 수 있게.

그리고 결정적인 하나의 아이디어가 있었다.


'대박 ㅎㅎ 이거 하면 터지겠는데요.'

'동욱님 딱인 듯.'

'나 이런 거 못해요!!!'


찬반이 갈렸으나 그때로부터 분위기가 녹고 많은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었다.




"오, 이 포인트 좋은데요? 누가 내신 거죠?"

"인후님이 시켰어요. 진짜 하기 싫은데!"

"이거 반응 터질 거예요. 굿!"


호불호가 갈리던 나의 아이디어에 춤선생님도 힘을 실어주셨다.

그것 때문에 연습량은 더 늘려야 했지만.




그리고 마지막 리허설 날.


거울 속 우리는

완벽하진 않았지만 흐트러지지 않았다.

강사님이 말했다.


“리더님, 많이 좋아지셨어요. 처음이랑.. 완전 다른데!?”


각 팀의 막내들도 나를 '삐걱이'가 아닌

'리더'로 나를 대해주고 있었다.


처음의 짜증에서, 이제는 기대감으로.


모두의 마음을 모으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무대의 모습만을 생각했다.


나는 춤을 잘 추게 된 게 아니었다.

도망치지 않았을 뿐이었다.




무대로


마지막 연습을 마치고 학원 문을 나서는데
해외영업팀 막내분이 말을 건넸다.


“인후님.”

“네?”


그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처음엔 좀… 걱정했어요. 인후님이 좀 못 미덥기도 했고요.”


나는 멈춰 섰다.

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이제는요. 그냥 믿고 가요. 의상부터 퍼포먼스 아이디어 주신 것도 좋았고요."

"모두 다 같이 주신 건데요."

"저희 이번 자리.. 욕은 안 먹겠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무대의 불이 꺼지고 덮인 암막 뒤에서

Heatbeat의 인트로가 흘러나왔다.


한 달 동안 이 소리를 들으며

발을 고쳤고, 넘어졌고,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 같은 소리가 무대 위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이제는 도망칠 수 없다.

나아가야 한다.


무대에 조명이 켜졌다.



(2.3 - 무대 위의 마이크)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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