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마케터 season2
[오늘부터 마케터 4장. 1화]
인사팀에서 마케팅팀에 왔다.
며칠 동안 나는 성실한 학생의 얼굴로 살았다.
회의에서 들은 말들은 외계어 같았다.
모두 적었고, 모르는 용어는 따로 찾아봤다.
프로그램 이름, 출연자 이름, 방영 시간, 시청률 추이, 온라인 반응.
어제보다 오늘 덜 낯설고,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익숙해지기를 바라면서
이것저것 억지로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며칠쯤 지나자 처음보다는 덜 어지럽게 들리는 말도 생겼다.
OOH가 옥외광고라는 것도,
스팟이 방송 사이에 붙는 프로그램 광고라는 것도,
타깃 시청률이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라는 것도.
그런데 알아듣는 단어가 늘어난다고 해서
갑자기 일을 잘하게 되는 건 아니었다.
이곳의 시간은 내가 있던 곳보다 훨씬 빨랐다.
회의가 끝나면 누군가는 바로 전화를 했고,
누군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미 다음 미팅 시간을 잡았다.
아이디어는 책상 위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누군가가 말을 꺼내면, 즉시 누군가가 움직였고,
정리는 늘 행동의 그다음이었다.
그동안 내가 해왔던 일은 주로 정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먼저 꺼내고,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그 속도를 따라가려고 애썼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먼저 해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내가 팀 안에서 꽤 애매한 위치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막내라고 하기엔 나이도, 사내 연차도 애매했고
경험자라고 하기엔 마케팅 실무를 너무 몰랐다.
선배처럼 보여야 하는 얼굴로
후배처럼 배우고 있었다.
그 감각이 처음 선명해진 건 회의가 끝난 뒤였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흩어지며 다음 일로 넘어가는 동안
나는 노트를 덮지 못하고 그 앞에 앉아있었다.
누구는 누구와 현장을 가고,
누구는 누구와 자료를 맞추고,
누구는 보고 전에 자연스럽게 서로를 확인했다.
그 모습들을 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처음 왔지만,
편하게 배우는 사람처럼만 보일 수도 없는 위치에 있구나.
그 애매함은 생각보다 사람을 빨리 지치게 했다.
그래도 멈춰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내가 가장 익숙하게 해온 방식으로 버텨보기로 했다.
적을 만들지 않는 것.
나를 도와주는 사람을 만드는 것.
실무가 부족하면
적어도 같이 일하기 불편한 사람은 되지 말자고 생각했다.
먼저 인사하고, 먼저 듣고,
먼저 묻고, 누가 작은 부탁이라도 하면 빨리 움직였다.
그건 내가 익숙한 방식이기도 했다.
대단한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처럼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대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며
조금 덜 불편한 길을 만들고,
애매한 부분을 잘 풀어가는 일은 곧잘 했다.
이전까지는 그랬다.
이해관계가 얽힌 조직에서
‘적이 없다’는 건 생각보다 쓸모 있는 능력이었다.
그래서 그때의 나는
그게 어디서든 내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윤정아 팀장님은 여전히 짧고 정확했다.
“인후 씨, 그 자료는 그냥 정리만 하지 말고
왜 저 숫자가 나왔는지도 같이 봐요.”
혼내는 말이라기보다
방향을 돌려주는 말에 가까웠다.
나는 말처럼 더 잘하고 싶어졌다.
우람님은 늘 에너지가 넘쳤다.
“인후님, 이런 건 너무 오래 생각하지 마세요.
직접 해보거나 던져보면 훨씬 빨라요.”
그 말도 맞았다.
자꾸 생각에 잠기는 나에게는 특히 더.
그래서 더 조급해졌다.
나는 확실하지 않은 상태로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쪽으로
이미 길들여진 사람이었다.
우정님은 뭐든 빨랐다.
그리고 생각보다 직설적이었다.
한 번은 회의 내용을 정리해서 공유하려다가
내가 앞 맥락을 놓친 부분이 있었는지 물었다.
우정님이 모니터를 보다가 말했다.
“이건 지난번 회랑 이어지는 거라
앞에 맥락까지 같이 꺼내서 보셔야 해요.”
"그게 뭐였죠? 제가 처음이라."
"제가 바빠서, 그냥 잘 찾아보세요."
담백한 말투,
틀린 말도 아니었다.
또 한 번은 신규 프로그램의
시청자 반응을 정리한 자료를 보다가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건 어느 커뮤니티에서 나온 의견이에요?”
우정님은 잠깐 나를 보더니 말했다.
“케이스마다 다른데…
근데 커뮤니티 안 보세요? 이거 기본인데."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제가 더 볼게요.”
나만 아직 출발선 한참 뒤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입인 그녀의 말투가 유난히 날카롭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냥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닌 거다.
아직은 내가 배우는 입장이니까.
박춘 과장님은 늘 한 발 떨어져 있었다.
회의에서도, 회의 밖에서도
자기 일이 아니면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한 번은 다들 바쁘게 움직이다가
잠깐 회의실에 과장님과 나만 남은 적이 있었다.
그는 내 노트를 한번 보더니 피식 웃었다.
“열심히 적으시네요.”
“아직 모르는 게 많아서요.”
“원래 처음엔 다 그렇죠.”
다정한 것도, 차가운 것도 아닌 중간 지점.
딱 반발짝 거리를 두고 물러나 있는 사람 같았다.
어느 날 오후였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사람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다음 일로 흩어졌다.
“우람님, 그럼 저 먼저 현장 갈게요.”
“좋아요. 우정님은 사진 찍어서 SNS에 올려주세요.”
“과장님, 저희는 재방 편성 확인하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네. 편성시간 스크롤 잘 확인해 주시고요.”
말이 오가고, 노트북이 닫히고, 의자가 밀렸다.
다들 망설임이 없었다.
나는 노트를 덮지 못한 채 잠깐 앉아 있었다.
지금 내가 누구와 같이 움직여야 하는지,
어떤 일을 먼저 잡아야 하는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때 우정님이 내 쪽을 한 번 보더니 말했다.
“맞다. 인후님. 남아서 저 대신 주간회의 정리해주실래요?”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우정님은 바쁘게 짐을 챙기며 말했다.
“가셔도 지금은 하실 게 없을 것 같아서요. 일단 저 먼저 갈게요. 늦어서.”
말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실무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었다.
나는 잘 몰랐으니까.
딱히 맡은 역할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나보다 나이도, 회사 연차도 어린 후배에게
정리부터 하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 순간,
무력감과 함께 자존심이 긁히는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 말에도 흔들리면
진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네. 정리해서 메일로 공유드릴게요.”
사람들이 하나둘 나갔다.
회의실 문이 닫히자
방금 전까지 말이 쏟아지던 공간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는 큰 회의실 한가운데 혼자 남아 있었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 일정하게 들렸다.
한동안 노트를 들여다봤다.
여전히 빽빽했다.
모르는 걸 놓치지 않으려 다급하게 적은 말들.
그런데 그날은 메모보다 옆의 빈자리가 더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따라 배우고,
누군가는 누군가와 손발을 맞췄다.
누군가는 자연스럽게 짝이 있었고,
누군가는 일의 흐름 안에 들어가 있었다.
사수와 부사수,
멘토와 멘티.
각자의 역할이 있다.
나만 조금 애매했다.
팀원이 홀수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덜 민망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숫자가 아니었다.
전에는 ‘적이 없다’는 게 안전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아이디어와 속도로 부딪혀야 하는 이곳에서
무던하다는 건, 결국 아무 색깔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뜻에 가까웠다.
적이 없는 것과
아직 해낸 적이 없는 것은
비슷해 보여도 전혀 다른 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그 한 끗 차이가 생각보다 훨씬 크게 느껴졌다.
그날 나는 팀을 옮긴 후에
처음으로 조금 공허하다고 느꼈다.
좋아하는 일을 시작하면
매 순간이 괜찮을 줄 알았다.
그건 착각이었다.
나는 늦게 시작했지만
그걸 티 내고 싶지 않았다.
배우고는 싶었지만
너무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사람들과 잘 지내는 무기만으로는
넘어갈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걸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한 건.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게 늦깎이 시작의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마저도
며칠 뒤, 누군가의 한마디로 완전히 부서지게 된다.
<오늘부터 마케터>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