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간의 농사 수확하기

  3주 동안 홀로 고군분투하며 마지막 연말 행사를 준비했다. 약 30명의 회원과 투자사, 협업 기업 담당자님들을 모시고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한 자리다. 입구에서 포토존을 지나 행사장에 들어오는 동선까지 세심하게 고려해 좌석을 배치했고, 든든한 다과 세팅도 마쳤다. 중간중간 계획이 일그러지는 상황이 발생했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다. 팀원들과 대표님과 함께 행사 오프닝을 무사히 시작했다.

  단상에서 자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새롭게 피봇팅한 서비스의 성장세를 발표하는 대표님을 보니 나 또한 뿌듯함에 울컥했다. 몇 년 동안 목표했던 투자를 무사히 받았고, 지금 이 자리까지 도달했다. 이보다 만족스러운 성과가 어디 있을까. “여기까지 잘 성장시켰다!“ 나는 고개를 돌려 팀원들의 얼굴을 하나씩 마주쳤다. 마지막이 될 이 순간, 

  “이들은 앞으로 더 높이 날아가겠지”

  사실 연말 행사라 해도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 혼자서 리드하는 첫 오프라인 행사라 긴장을 많이 했던 터라 결정해야 할 순간마다 머리가 굳어버리곤 했다. 행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정신없이 긴장 가득한 하루를 보냈다. 퇴근 후 내게 남은 건 아쉬움과 후련함, 딱 두 가지 감정뿐이었다. 잠시 쉬어 가는 시간을 갖는다는 결심은 아직도 후회하지 않는다. 끝이 다가올수록 마음은 가벼워졌고, 번아웃은 빠르게 사라져간다.

  이제 뭐 할 거냐는 물음에 명확한 답은 없다. 단지 즐겁지 않은 일을 멈추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나의 퇴사 소식에 누군가는 한숨을, 누군가는 응원을, 누군가는 부러움을 표해주었다. 

퇴사한 12월 31일, 다음 날인 새해 첫날. 알람 없이 느긋하게 일어나 올해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사소한 것부터 적어보았다.

✔️ 못다 읽은 책 읽기

✔️ 평일 오전에 홀로 카페 가기

✔️ 에밀리인 파리 정주행

✔️ 영어 회화 학원 다니기

✔️ 봉사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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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공 마케터 오피스 에세이 집필

✔️해외 한 달 살기 도전

  이 많은 투두리스트 중에서도 1순위는 ‘일주일 동안 집에만 처박혀 있기’. 돈도, 일도, 계획도 생각하지 않고 육체적, 정신적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투두리스트를 작성하고, 캘린더를 보는데 아차차! 나는 완벽한 100% 백수가 아니다. 회사를 다니며 겸했던 외주 에디터 원고 마감이 이번 주까지였고, 퇴사할 때 대표님이 맡긴 회사 블로그까지 콘텐츠를 작성해야 한다. 첫 번째 투두리스트는 실행하지 못했지만. 오전에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자유 시간을 즐기기로 변경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내게 새로운 제안이 들어왔다. 바로 인스타그램 콘텐츠 제작 및 운영 건이었다. 퇴사할 때 분명 인스타그램과 굿바이 인사를 했지만, 처음 접해보는 분야의 인스타그램 운영자 제안 건은 꽤나 혹했다. 브랜드에 대해 간단하게 조사했을 뿐인데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생기 넘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래 역시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그렇게 퇴사 한 지 한 달 만에 3개의 클라이언트가 생겼고, 자연스럽게 반백수 프리랜서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스타트업에서 보낸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처음엔 막막했던 비전공자로서의 시작도, 빠르게 적응하며 성장했던 순간도, 그리고 번아웃을 마주한 날들까지 모두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 어떤 경험도 나를 후퇴시키지 않았다. 이제 나는 새로운 길에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이 책을 읽는 당신도, 혹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면 꼭 기억하길 바란다. 잠시 멈춰도 괜찮다고, 그리고 멈춘 자리에서 새로운 길이 시작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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