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여권 스탬프보다 마트 영수증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시대가 왔습니다.

과거 우리는 가이드북의 별점, 즉 '미슐랭'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순례하듯 이동했습니다. 이를 '관광(Tourism)'이라 불렀죠. 하지만 지금, 여행자들의 구글맵이 가리키는 곳은 예약이 꽉 찬 파인 다이닝이 아니라 동네 어귀의 슈퍼마켓, '돈키호테'나 '테스코'입니다. 잘 차려진 코스 요리 대신 투박한 델리 코너를 털고, 명품관 쇼핑백 대신 현지 마트의 종이봉투를 듭니다.

스카이스캐너는 이를 '마트어택(Mart Attack)'이라 정의하며, 2026년 여행 트렌드로 발표했습니다. 도대체 왜, 우리는 이토록 남의 나라 슈퍼마켓에 진심이 된 걸까요? 이 현상의 이면에는 달라진 소비자의 욕망과 행동 패턴이 숨어 있습니다.

🔎 관람에서 '접속'으로: 라이프시잉(Life-seeing)의 시대

 스카이스캐너의 '2026년 여행 트렌드'는 흥미로운 지점을 가리킵니다. 한국인 여행객의 절반 이상이 현지 슈퍼마켓을 필수 코스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여행의 목적이 단순히 '이동'에서 '체류'로 변화했음을 시사합니다. 주목할 것은 그 동기입니다. 그들은 쇼핑 자체가 아니라 '현지 식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마트로 향합니다.

"여행은 이제 명소를 구경하는 '사이트시잉(Sightseeing)'에서, 현지인의 삶 속으로 깊숙이 접속하는 '라이프시잉(Life-seeing)'으로 진화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박물관의 박제된 유물보다, 살아있는 현지인의 장바구니 속에서 더 생생한 문화적 동질감을 느낍니다. 파리지앵이 퇴근길에 실제 집어 드는 와인이 무엇인지, 도쿄의 직장인이 편의점에서 고르는 '소울 푸드'가 무엇인지 훔쳐보는 것. 마트의 진열대는 그 도시의 취향과 경제, 그리고 삶의 질감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갤러리이기 때문입니다.

⛏️ 디깅(Digging) 모멘텀: 나만의 보물을 발굴하는 기쁨

마트어택의 본질은 '능동적 발굴'의 즐거움에 있습니다.

유명 맛집을 찾아가는 것이 남들이 정해준 정답을 확인하는 과정이라면, 낯선 마트에서 새로운 간식을 고르는 행위는 '실패의 가능성을 안고 떠나는 모험'입니다. 

최근 Z세대를 중심으로 확산된 '디깅' 소비 트렌드가 여행지에서도 발현된 것입니다.

누구나 아는 뻔한 기념품 대신, 구석진 선반에서 나만이 아는 향신료를 찾아냈을 때의 도파민은 강력합니다. 이 순간 여행자는 단순한 소비자가 아닌, 자신의 안목으로 취향을 선별하는 '큐레이터'가 됩니다. "이거 한국에는 아직 안 들어온 거야"라는 말은, 이 탐험가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달콤한 전리품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정말 '가성비' 때문일까요?

💸 스마트한 과시: '가심비'를 넘어선 '효능감'

물론, 고물가라는 현실적인 배경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트어택을 단순히 '지갑이 얇아져서'라고 해석하면 트렌드의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절약이 아닙니다. 선택의 주도권입니다. 30만 원짜리 디너 대신, 3천 원짜리 현지 치즈와 5천 원짜리 와인을 사서 에펠탑 아래 잔디밭에 앉는 것이 여행자는 '관광객 대상의 거품'을 걷어내고, 현지 시스템을 영리하게 활용했다는 '효능감'을 얻습니다.

자본의 크기가 아닌 '정보력'과 '안목'으로 여행의 질을 높이는 것이 바로 요즘 여행자들이 추구하는 '스마트한 과시'의 진화한 형태입니다.

🎒 감각의 내면화: 경험을 '먹어서' 기억하다

마지막으로 '기념품'의 정의가 재정립되었습니다.

과거의 여행이 냉장고 자석이나 스노우볼처럼 '전시하는 물건'을 남기는 것이었다면, 마트어택 세대는 젤리, 소스, 티백처럼 '소비되어 사라지는 물건'을 선호합니다.

시각적 경험(사진)은 휘발되기 쉽지만, 미각과 후각의 경험은 뇌의 변연계에 깊이 각인됩니다. 여행지에서 사 온 트러플 소스를 집에서 뜯는 순간, 우리는 다시 그 여행지의 식탁으로 소환됩니다. 마트어택은 여행의 경험을 혀끝으로 기억하고, 일상으로 가져와 내면화하려는 '감각의 확장'입니다.

이제 가장 매력적인 여행 콘텐츠는 "어디서 인생샷을 남기세요"가 아니라, "현지 마트에서 이 아이템만은 꼭 집어오세요"라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화려한 호텔 조식보다, 내 손으로 고른 현지 마트의 납작 복숭아 한 알이 더 깊은 울림을 주는 시대가 왔으니까요.

다음 여행에서는 가이드북을 덮고, 마트 진열대를 펼쳐보세요. 가장 사소한 영수증 한 장이, 때로는 가장 선명한 여행의 지도가 되지 않을까요?

썸네일, 본문 이미지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