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을 설계하는 마케터의 판단 ① / 5


RFP를 받으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있다. 이번에는 무엇을 새롭게 해야 하지.


경쟁 제안이면 더 그렇다. 광고주도 새로운 방향을 기대한다. 지난해와 같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새로운 파트너를 찾지는 않는다. 그래서 타깃을 다시 정의하고, 요즘 반응이 좋은 콘텐츠를 찾고, 새로운 채널과 크리에이터를 붙인다.


그런데 제안서를 오래 쓰다 보니 순서가 바뀌었다. 새로운 것을 찾기 전에 한 가지를 먼저 확인한다. 이 브랜드가 새로워질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오랜 시간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쌓아온 F&B 브랜드가 있다고 해보자. 이번 캠페인의 목표는 1020 소비자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유행하는 밈을 쓰고, 요즘 말투로 이야기하고, 10대가 좋아하는 크리에이터를 기용하면 될까. 그런 시도가 필요할 수는 있다. 다만 그 순간부터 회의 때마다 확인해야 하는 질문이 생긴다. 이걸 우리 브랜드가 해도 이상하지 않은가.


새로운 타깃에게 다가가는 것과 새로운 브랜드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젊은 소비자에게 친근해지려다 기존 고객이 알고 있던 품질의 이유와 태도까지 흐려지면, 캠페인은 주목을 얻고 브랜드는 잃는다.


담당했던 한 소비재 캠페인에서도 같은 고민이 있었다. 제품이 가진 전문적인 이미지를 그대로 반복해서는 새로운 소비자에게 닿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문성을 버리고 갑자기 가볍게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제품의 본질은 두고 언어를 바꿨다. 전문적인 제품을 나의 취향을 찾는 선택지로 번역했다. 또 다른 캠페인에서는 기능을 앞세우는 대신 소비자가 제품을 만나는 저녁의 쉼이라는 장면을 설계했다. 브랜드는 그대로였다. 브랜드가 사람을 만나는 장면이 달라졌을 뿐이다.


새로운 캠페인을 만들다 보면 많은 것을 바깥에서 빌려오게 된다. 포맷을 빌리고, 크리에이터의 화법을 빌리고, 다른 문화의 문법이나 플랫폼의 리듬을 빌린다. 빌려오는 시도 자체는 필요하다. 브랜드가 자기 안의 언어만 반복하면 지금의 소비자가 이해할 접점이 줄어든다. 문제는 빌려오는 것과 바꿔버리는 것을 구분하지 못할 때 생긴다.


형식은 빌릴 수 있다. 말투도 조정할 수 있다. 채널마다 다른 표정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브랜드가 왜 존재하는지, 어떤 약속을 지켜왔는지까지 바뀌면 새로운 캠페인이 아니라 갑자기 다른 브랜드가 된다. 새로움은 브랜드 밖에서 가져오되, 선택의 기준은 브랜드 안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제안 초기에는 아이디어를 꺼내기 전에 세 가지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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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지켜야 할 것이다. 브랜드의 핵심 가치, 소비자가 신뢰하는 이유, 제품이 실제로 제공하는 효용이다. 캠페인이 바뀌어도 여기는 쉽게 흔들면 안 된다. 두 번째는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타깃이 이해하는 언어, 제품을 만나는 장면, 메시지의 순서다. 같은 가치를 지금의 소비자에게 맞는 표현으로 바꾸는 영역이다. 세 번째는 실험할 수 있는 것이다. 채널, 포맷, 크리에이터, 콘텐츠의 리듬이다. 실패 비용을 관리하면서 빠르게 검증할 수 있다.


이 경계를 정하지 않으면 회의는 재미있다와 우리답지 않다의 감상 싸움이 된다. 반대로 경계를 먼저 합의하면 새로움은 취향이 아니라 전략의 문제가 된다.


경계를 정한 뒤에는 아이디어를 이렇게 본다. 왜 지금 이 브랜드가 해야 하는가. 브랜드 이름을 지워도 다른 브랜드의 캠페인과 구분되는가. 새로운 타깃에게 다가가면서 기존 고객이 알던 브랜드의 이유는 남아 있는가. 캠페인이 끝난 뒤 브랜드가 반복해서 쓸 자산이 생기는가.


첫 번째는 시의성을, 두 번째는 고유성을, 세 번째는 일관성을, 네 번째는 축적 가능성을 본다. 특히 마지막이 중요하다. 한 번의 화제성으로 끝나는 아이디어는 캠페인 비용을 소진하지만, 다음 캠페인에도 쓸 수 있는 장면과 언어를 남기는 아이디어는 브랜드 자산이 된다.


예전에는 좋은 제안서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가 들어 있는 제안서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좋은 제안서는 브랜드가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 정확히 아는 제안서에 가깝다. 그리고 그 범위 안에서 아직 아무도 보지 못한 장면을 만든다.


브랜드가 가진 것을 버리지 않고, 지금의 소비자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번역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맥락을 설계한다는 말의 의미도 여기에 가깝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제안서는 브랜드보다 앞서 있는가, 아니면 브랜드를 지금의 소비자 앞에 데려다 놓고 있는가.


다음 편에서는 '우리도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거 해보면 어떨까요'라는 질문을 다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