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속박입니까, 해방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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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았다. 
4학년의 마지막 학기가 끝나기 전인 12월 초, 입사가 결정됐다. 내가 광고회사에 들어가게 되다니. 꿈만 같았다. IMF발 경제위기가 오기 직전인 1996년 겨울의 일이었다. 전공도 광고와 상관이 없었고, 광고 관련 동아리 활동이나 공모전 경험도 없었다. 그냥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10여 명의 신입사원을 뽑는데 지원자가 2,000명이 넘었다고 나중에 인사팀에서 귀띔해 줬다. 눈에 띄고 싶어서 자기소개서를 10년 후의 내 가상 인터뷰 기사가 실린 신문처럼 만들고, 대학시절 그린 만화들을 입사원서와 함께 제출한 게 도움이 됐을 거라고 막연히 추측했다.

첫 출근을 하는 1월까지 남은 3주 정도가 인생에서 가장 신나는 시간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원하던 직업을 갖게 됐고, 일은 아직 안 해도 된다! 와, 다시 돌이켜 생각해 봐도 살짝 설렌다. 광고회사를 다니며 처음 얼마간은 정말 행복한 일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 하나하나 신기하고 흥분됐다. 이렇게 재미있는 일을 돈을 주고라도 배우고 싶은데, 돈을 받으면서 할 수 있다니! 밤에 침대에 누우면, 내일 회사에서 무슨 재미있는 일을 하게 될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GD가 그러셨던가, 영원한 건 절대 없다고. 세상에 즐겁기만 한 일은 없었다. 광고 일의 즐거움 못지않게, 괴로움도 배우게 됐다. 직급이 올라가고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 더 많아지면서 괴로움이 즐거움을 압도하는 시기도 맞게 됐다. 과로와 압박감으로 병을 얻기도  했다. 힘이 들다가도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맡으면  또 일에 빠져들곤 했다. 그렇게 눈 깜박할 사이에 20여 년이 지났다.

나에게 일이란 무엇인가. 어떤 의미인가. 이토키 도쿄의 XORK의 광고를 보다가 잠시 생각해 본다.

働く。それは
束縛ですか、 解放ですか。

“일하다.” 그것은
속박입니까, 해방입니까.

XORK(ゾーク ‘조크’라고 읽는다)는 새로운 사무환경을 선보이는 공간이다. 오피스 가구 전문업체가 만드는 실험적인 공유오피스이면서, 새로운 콘셉트로 자유로운 사무환경을 제안한다. 그런 공간이기에 구체적인 공간의 특징을 말하기에 앞서 일의 본질을 묻는다. 일한다는 것은 당신을 속박하는 것인가, 당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인가.

출처: XORK 홈페이지 (https://www.itoki.jp/xork)

XORK의 지향점은 ‘자유’다. 일이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것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무환경도 개인의 자유로움을 추구할 것이라는 것을 광고의 이미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세련된 얇은 노트북. 벗겨진 구두. 무중력 상태의 편안한 자세. 극한의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표현하는 이 광고 속 여성의 모습은 그저 포장된 이미지만은 아니다. 이 상태가 영원할 수 없을 뿐이다. 이 해방감은 일하는 어떤 최상의 순간에 잠시 다다를 수 있는 균형점이다. 균형은 반드시 깨진다. 변화되는 상황의 중력이 언제 이 여성을 끌어내릴지 모른다.

일한다는 것은 해방이면서 속박이 될 수밖에 없다. 어느 한 가지 속성만 갖는 일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일을 통해서 해방과 속박의 방정식을 평생 풀어가는 것이 우리 운명이다.

우리는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 일한다. 스스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살아간다. 또,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일을 한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직업이라는 틀에서 구현하게 된다. 어렸을 때 “커서 뭐가 되고 싶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 직업으로 귀결된다. 일은 해방이다.

그러나 얽매임이 없는 일은 없다. 회사라는 조직에 얽매이고, 클라이언트에, 고객에 얽매인다. 일을 둘러싼 수많은 인간관계가 삶을 복잡하게 만든다. 일이 힘든 건 참아도 사람이 힘든 건 못 참는다. 때로는 벗어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명의만 내 것으로 된 은행 소유의 아파트와 자동차 할부금을 위해, 아이의 학원비를 위해, 혹은 또 다른 꿈을 위해 그 얽힘에 자발적으로 동조한다. 일은 속박이다.

회사를 운영하는 입장이 되니 또 다른 해방과 속박이 찾아온다. 처음 독립해서 내 결정대로 모든 일을 처리할 때는  큰 해방감을 느꼈다. 더 이상 좋을 수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책임이 따른다. 직원들의 월급날은 어김없이 돌아오고, 회사의 운영이 예상대로 흐르지 않을 때는 큰 압박과 부담에 시달렸다, 조급한 마음에 현명하지 못한 결정을 하기도 했다. 일이 많으면 많아서 힘들고, 없으면 없어서 힘들다.


아, 인생 피곤하다. 그냥 재벌집 아들로 다시 태어나면 괜찮을까? 드라마에 의하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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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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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티브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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