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이 도시의 리듬을 다시 세팅하다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나면 한동안 주인공처럼 걷고, 드라마 속 배경음악을 흥얼거립니다. 만약 스크린 속 풍경이 내 일상과 겹쳐진다면 어떨까요? 최근 전 세계 여행 시장에는 바로 이 감정을 좇는 새로운 흐름, ‘셋젯팅(Set-jetting)’이 등장했습니다.

‘세트(Set)’와 ‘여행(Jetting)’을 합친 이 신조어는 스크린 속 장면을 실제로 찾아가 체험하는 여행 트렌드를 의미합니다. 팬들은 더 이상 단순히 ‘보는’ 관객이 아닙니다. 콘텐츠의 주인공이 걸었던 길을 직접 걷고, 카메라가 비췄던 시선 그대로 장면을 복원하며 ‘감정을 재현하는 여행자’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OTT 플랫폼의 글로벌 동시 공개, SNS 인증 문화, 팬덤의 체류형 소비가 맞물리며 셋젯팅은 콘텐츠가 곧 여행의 목적지가 되는 시대를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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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팝 데몬헌터스 — 서울을 세계관으로 바꾼 애니메이션

이 변화의 중심에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헌터스〉가 있습니다. K-팝 아이돌이 악마를 사냥한다는 독특한 세계관 속에 서울의 실제 명소들을 배경으로 담아낸 이 작품은 2025년 한류 팬덤형 관광을 대표하는 셋젯팅 현상을 촉발했습니다.

팬들은 스크린을 넘어 움직였습니다. 강남의 COEX K-POP 스퀘어, 종로의 낙산공원 성곽길, 북촌한옥마을, 올림픽주경기장, 명동 거리, 청담대교, 경복궁, N서울타워까지, 애니메이션의 장면이 곧 여행 코스로 변했습니다.

COEX K-POP 스퀘어: 인트로 티저 ‘Golden’이 공개된 초대형 3D 전광판 앞에서 팬들이 같은 각도로 ‘성지 인증’ 사진을 남겼습니다.

낙산공원 성곽길: 주인공 루미와 진우의 데이트 장소로, 서울의 야경과 함께 ‘한양도성길 산책 코스’로 재조명되었습니다.

올림픽주경기장: 헌트릭스 공연 무대로 사용되어, 실제 콘서트 일정과 연계한 ‘공연+성지 패키지 투어’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명동, 청담대교, 경복궁, N서울타워 등은 각각 K-팝의 현대성과 한국의 전통이 공존하는 장면으로 활용되어, ‘서울’이라는 도시가 하나의 거대한 스테이지로 확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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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버랜드 ‘케이팝 데몬 헌터스’ 테마존 — 셋젯팅의 현실 확장

2025년 9월 26일, 에버랜드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테마로 한 한옥 스타일의 전용 공간을 정식 오픈했습니다. ‘The Everland of OZ’ 가을 축제 콘텐츠 존 안에 상시 운영 중입니다.

이 테마존은 애니메이션의 세계관을 한국적 전통미와 결합해 설계되었습니다. 입구의 대형 LED 스크린에서는 인기 OST 영상이 상영되며, 포토스팟에는 주요 캐릭터 일러스트와 등신대, 호랑이 캐릭터 ‘더피(Duffy)’의 아트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에버랜드 ‘케이팝 데몬 헌터스’ 테마존은 K-콘텐츠 팬덤과 글로벌 관광객을 아우르는 컬처 허브로, 애니메이션의 몰입감을 놀이공원 체험으로 확장하며 새로운 셋젯팅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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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젯팅이 바꾼 도시의 풍경

서울시는 COEX–낙산–북촌–명동–N서울타워를 잇는 ‘셋젯팅 관광 루트 맵’을 제작했습니다. 또한 서울관광재단은 2025년 8월 28일부터 공식 프로그램인 ‘서울 트립 헌터스 스탬프투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케이팝 데몬헌터스〉의 배경이 된 서울 명소 8곳을 방문하며 스탬프를 모으는 미션형 투어입니다. 참여자는 N서울타워, 서울한방진흥센터, 북촌한옥마을, 낙산공원, 코엑스 케이팝 스퀘어, 한강공원, 명동거리, 롯데타워를 순회하며 각 장소에서 미션을 수행하고 스탬프를 찍습니다. 8개 관광정보센터에서 지도를 수령한 후 인증을 완료하면 한정판 기념 굿즈도 받을 수 있습니다. 지자체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AR 포토 미션, 스탬프 랠리, 한정판 굿즈 이벤트를 도입해 팬들이 여행 중 세계관을 완성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경험의 인프라 구축입니다. 콘텐츠 속 서사가 도시의 동선을 재편하고, 팬들의 체류가 지역 상권의 리듬을 바꾸고 있습니다. 팬덤은 더 이상 소비자가 아니라 도시 경험의 설계자입니다. 그들의 움직임이 도시의 시간표가 되고, 그들의 참여가 경제의 흐름을 바꿉니다.

실제로 드라마 <도깨비> 방영 이후 강릉 주문진 해변은 연간 방문객이 증가했고, <왕좌의 게임> 촬영지인 크로아티아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세트장이 되었습니다. 콘텐츠가 도시의 지형과 소비의 리듬을 바꾸는 일은 이미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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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젯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만큼, 지속가능한 관광 정책과 체험 설계가 필요합니다. 메가 스팟 중심의 과밀을 방지하기 위한 분산 관람 코스 개발, 촬영지 원상복구와 주민 보상, 방문 에티켓을 포함한 ‘셋젯팅 윤리 가이드’ 마련, 라이선스 기반 굿즈·AR 투어·테마 스탬프 랠리 등 팬 참여형 프로그램의 수익 다각화, 그리고 방문자 흐름과 소비 패턴을 분석하는 데이터 기반 운영이 요구됩니다. 관광 인프라와 안전 시스템이 함께 개선될 때 셋젯팅은 일시적 유행이 아닌, 지속 가능한 도시 체험 산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셋젯팅은 관광산업과 도시계획, 팬덤 문화가 만나는 교차점에 있습니다. 콘텐츠가 도시의 리듬을 바꾸고, 팬덤이 지역의 경험 구조를 다시 설계하는 시대. 셋젯팅은 여행의 정의를 바꾸고 있습니다. 여행이란 어쩌면 세상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내가 살아 있는 순간을 다시 세팅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케이팝 데몬헌터스〉의 팬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스크린 속 장면을 좇으며 현실의 장소에서 자신만의 리듬을 회복했습니다. 효율보다 체험, 경로보다 의미, 장소보다 연결. 이제 여행은 ‘보는 일’이 아니라, 함께 살아보는 일이 되었습니다. 셋젯팅은 효율의 여행이 아니라 경험의 재설계 기술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지금, 서울의 거리를 다시 디자인하고 있습니다.

썸네일, 본문 이미지 출처📸 | Unsplash · 서울관광재단 · Everland · K-pop Demon Hunt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