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마케터 1장 지옥의 방



1.4 - 쓸모 있는 인간





무기관리소장


어느새 창고의 일은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날은 새로운 노트북이 많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그동안 정리한 낡은 것들을 보내고 새로운 것들을 받았다.

뭔가 새로운 느낌이 들었고, 기분도 나쁘지는 않았다.


새로운 노트북을 정리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들은 곧 회사 사람들에게 하나씩 쥐어지겠지.

그걸로 모두가 일을 할 테고.


노트북은 직장인들의 ‘무기’다.

이게 없으면

업무도, 회의도, 메일도 불가능하다.


그럼 나는 뭐지?

그 무기를 관리하는 사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기관리소장 같은 거.


그런 이름을 붙일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치로운 일이다.



"언제 새 노트북 들어와요?"

"느려 죽겠는데... 오면 꼭 알려줘요."


볼 때마다 묻던 사람들의 말이 떠올랐다.

예정보다 조금만 더 빨리 교체를 진행해볼까.


좋은 일이니까.

빨리 해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오늘 3구역 담당자 분들

노트북 교체 모두 진행합니다.’


그 공지를 올린 날,

사람들이 몰려왔다.


“저 급해요.”
“지금 회의 들어가야 해요.”
“이거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


“죄송해요. 이거 다 체크해야 해서요.”


내가 노트북 하나를 만지는 동안
누군가의 전투는 멈춰졌다.


나는 매뉴얼대로 다 해야 했지만,

일에 쫓기는 사람들의 마음은 급했다.


“인후님, 그렇게 열심히 안 하셔도 돼요.

그냥 주세요.”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몰려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다.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여기서는
열심히만 한다고
칭찬받는 게 아니었다.


여기서 너무 열심히 하면
남의 시간을 빼앗는 사람이 된다.


나는 무기를 관리하다가

누군가의 싸움을 멈추게 하고 있었다.


좋은 일을 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었다.


무기관리소장?

나는 그냥 길목을 막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디부터 꼬인 걸까.

아니,

처음부터 꼬여 있었던 건 아닐까.





사랑니 대탈출


어느새 3개월이 흘렀다.

창고에서 보낸 3개월.


나는 뭘 배웠을까.

아무것도 없었다.

노트북 번호만 외웠을 뿐.


그래도 노트북 문제생겼을 때

고쳐주는 것만큼은 늘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마음이 확실해졌다.

내가 원하는 일은 이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다시 시작하자.'


새로운 일을 생각해 본다.

그런데 요즘 같은 불경기,
무턱대고 그만두면 위험하지 않을까?


일단 회사를 다니면서
다른 회사를 써보자.

그렇게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퇴근 후, 그리고 주말에 몇 개 회사에 지원을 한다.

‘마케팅’을 뽑는 곳, 그리고 이름 들어볼 만한 곳들로.


그리고 한 곳에서

반가운 서류 합격의 소식을 듣는다.


문제는 면접이었다.

면접은 언제나 그렇듯 평일 낮시간이었다.

일정은 협의가 아니고, 통보였다.


신입이 갑자기 연차를 쓰면 티가 나지 않을까?


가뜩이나 창고에 들어온 상황에서

다른 곳을 쓰다 들키면 내 위치가

더 위험해질 것 같았다.


사실.. 더 멀어질 것도 없지만.

지금 한 번 더 잘못 선택하면

아무 데도 속하지 못할 것 같았다.


뭔가 자연스럽고,

누가 봐도 이해할 만한

좋은 명분 없을까…?


그 고민을 하다가 거리에서

한 치과의 광고 전단지를 받는다.


생각 없이 보다가 그 안에 적힌

글자가 머리를 가득 채운다.


‘사랑니…!’


그렇다.

나에게는 아직 뽑지 않은 사랑니가 네 개나 있었다.


이걸로 해볼 수 있겠는데…?


이건 도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거 말고는
지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사랑니로 알리바이를 만들었다.

하루 연차.
명분은 치과 예약.

이가 아파서 사랑니 뽑기.
그리고 그날, 면접.


이 정도면 의심받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진짜로 이를 뽑으면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흔적이 남는다.


아프겠지만, 분명하고,
되돌릴 수 없는 증거.


그리고 나는
진짜로 사랑니를 뽑았다.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기서 벗어나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작은 가능성을 붙잡기 위해.


그리고 그날 면접도 보았다.





운명의 장난


그렇게 연차를 쓰고

면접부터 사랑니까지 무사히 뽑고

다음날 자연스럽게 출근한다.


“이빨 잘 뽑고 왔어?”


남팀장님이 묻는 말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처음 뽑아봤는데 아프더라고요.”


그런데 공기가 이상했다.
조대리가 웃는 것 같은 얼굴을 짓는다.

반 박자 늦게.

저것은 분명 웃는 얼굴이다.


그 웃음은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 후, 알게 됐다.

그날 지원한 회사의 면접관이 누구였는지.


같은 회사 사람이었다.

과거에 우리 회사에, 우리 팀에 있던,
경력직으로 이직해 다른 회사로 간 사람.
그 사람이 나의 면접관이었다.


그분이 나가고,

새로 생긴 자리에

내가 들어온 것이었다.


하필이면

나는 지금 회사를 적고,

이곳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사람은 분명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200% 우리 팀 누군가에 연락이 갔을 것이다.



결과는 일주일 후에 왔다.

불합격.

면접은 떨어졌다.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받아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문자 한 줄.


"죄송합니다. 다음 기회에..."


나는 문자를 보고 또 봤다.

혹시 내가 잘못 읽은 건 아닐까.


더 무거워진 건 팀에서의 분위기였다.



그날 이후,

조대리님은 내 자리를 지나칠 때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남팀장님은 회의에서

내가 하는 일도 꼭 조대리님에게 물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거나

발언을 하지 않는 '없는 사람'이 되었다.


아무도

그날의 연차에 대해

다시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가 없었다.

다들 이미 알고 있었을테니까.


사랑니를 뽑은 날.

그날이 나를 더 깊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DVD 사건일지


요즘 회사에서 큰일이 하나 있었다.


점점 회사 영화의 DVD가 팔리지 않았다.

심지어 흥행이 잘 된 영화까지도 곤두박질쳤다.


처음엔 시장 탓인 줄 알았다.

그런데 원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있었다.


이유는 불법복제 때문이었다.

어딘가에서 엄청난 양으로 복제가 되고 있었다.


DVD 사업은 회사에서 알짜 수익원이었기에

이대로 두면 사업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반드시 그 업체를 잡아야 했다.

회사 차원에서 경찰에 수사를 의뢰를 했고,

마침내 업체의 본거지를 알아내게 되었다.


"이번에는 꼭 잡아야 합니다."


봉고차 안.


형사 2명.

조대리님.

그리고 나

.

"회사 담당자 2명이 현장에 가야 법적 증거가 됩니다."


조대리님이 담당 실무자였고
그리고 나는…
그냥 인원수를 채우는 역할이었다.



차를 타고 한참 들어간 곳은

경기도 한적한 공장 근처였다.


비가 오는 밤.
우리는 쥐 죽은 듯 기다렸다.


“전에도 몇 번 추적했었는데,

번번이 증거를 못 잡았어요.

오늘은 꼭 잡아보시죠."


수사관분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중요한 거.

꼭 담당자를 붙잡아야 해요.

물건만 입수해 봐야 또 꼬리 자르고 도망갑니다.”


오늘을 놓치면 회사에서는 위험에 빠진다.

이 순간 끊어내야 다시 살아날 수 있다.


하필 이런 날이 비가 쏟아지는 밤일 줄은.





처음, 추격전


복제업체는 그 분야의 베테랑이라 워낙 신출귀몰하여

조금만 눈치채도 금방 달아난다고 했다.


증거물이 있어도, 담당자를 놓치면 똑같은 것이 반복이 된다.

철저하게 준비에 나선다.

수사관 두 분이 나눠서 진입하고, 조대리님은 입구를 지킨다.


나의 포지션은 공장 뒷길을 지키는 것이었다.

설마 이런 뒷길까지 누가 올까?


그런데 뒷길에서 대기하던 내 앞으로 누군가가 뛰쳐나왔다.

공장 담당자였다.

복제의 핵심 담당자.

제보 안에 묘사된 그 사람의 모습과 유사하다.

재빠르게 나를 밀치고 저 멀리 달아난다.


내 몸이 먼저 움직였다.

원래는 내가 따라가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경찰도 아니고,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서 있기만 하면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미

전력을 다해 뛰고 있었다.


왜였을까.

분노였을까.

억울함이었을까.


정의감?

그런 거창한 게 아니었다.


순간 머릿속에 창고의 서늘한 공기가 스쳤다.

기계 소리만 가득한 그 방.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그 시간들.

평생 노트북이나 닦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인간.


‘여기서 이거라도 못 잡으면…

난 진짜 쓸모없는 인간이 된다.’


그 공포가 나를 뛰게 만들었다.

나는 빗속으로 몸을 던졌다.


아무도 없는
비 오는 골목길.

뛰는 게 익숙지 않아

그만 발이 미끄러지고, 몸이 넘어진다.


그러다 얼굴이 바닥에 부딪혔다.
상처가 났다.


순간 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올라왔다.

그리고 일어나 울부짖었다.


“아아아아아!!!”


갑자기 왜였는지는 모른다.

오랫동안 말없이 창고에 있던 울분인지

무엇에 대한 분노였는지 모르지만 전력질주를 하며 뒤따른다.


“넌 뭐야!!

왜 그렇게 따라와!”

내가 뭐냐고?!

난.


"나 회사원이다!”

미친 사람처럼 질주했다.
비가 눈으로 들어왔고
숨이 턱까지 찼고
다리는 말을 안 들었다.


그런데도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내 손이 그 사람의 옷깃을 잡았다.

그리고 같이 뒹굴면서 꽉 붙잡았다.


“좀 놔라!”

벗어나려는 저항에 몸이 욱신거렸지만

온 힘을 다해 잡고 있었다.


“내가 담당자라고!! 못 놔!!”





이상한 박수


그리고 회사였다.

누군가 내 어깨를 쳤고
모두가 박수를 쳤다.


“인사팀 신입이 잡았대.”
“진짜?”
“대박인데?”


나는 얼떨떨했다.


내가 회사에서 처음으로
인정받은 일이,
노트북을 잘 정리한 것도 아니고
인사팀 문서를 잘 만든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잡은 일이었다니.


나는 회사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이름이 호명되고 박수를 받았다.


그날의 박수는 이상했다.
따뜻해서가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워서 이상했다.


그날만큼은 내가 회사를 구한 사람 같았다.

서버실과 자리를 넘나들며

노트북을 관리할 때는 전혀 듣지 못한 칭찬이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이 회사는
그냥 ‘열심히 하는 일’이 아닌
‘쓸모 있는 일’에 박수친다는 것을.


그날 이후
사람들의 말투는
조금 달라졌다.


하지만 나에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내 자리는 그대로였다.


박수는 끝났고,
사람들은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박수는 보상이라기보다
다음 쓸모를 향한 신호에 가까웠다.


다음 또 쓸모를 만들어야지!

한 번으로 다가 아니었다.


나는 달리고, 넘어져서

첫 쓸모가 되었다.


회사의 쓸모를 채워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비쌌다.


얼굴의 한쪽 볼에는 상처를 덮은 밴드가

나를 덮어주고 있었다.





“꿈이 뭔가?”


한 번씩 문득

첫날의 그 질문이 떠오른다.

“그래, 자네 꿈이 뭔가?”

나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회사에서
제 이름으로 된 일을
하나 제대로 해보는 겁니다.

마케팅하면서요.”


잠깐의 침묵.

“…우리, 인사팀 맞지?”
“마… 맞죠.”


지글지글 스테이크 소리.
나는 철판 위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고
맞은편의 둘은 짜장면과 볶음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그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중이 되어서야 조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안다.

그날,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시작하는 사람의 솔직함은

때로는 위험할 수 있다.


..이제부터라도 나는 달라질 수 있을까?



(다음 2장. '마이크의 주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