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마케터 2장 마이크의 주인공



2.1 - 말의 무게






그 사건 후


DVD 추격 사건 이후 일주일이 지났다.
회사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그거 잡은 그 친구 맞지?”
“고생 많았어. 덕분에 우리 올해 잘 되겠어.”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 더 쳐다봤다.
한 번 더 웃어줬다.


이것이 혹시 ‘인정’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내 자리로 돌아오면
세상은 변한 게 없었다.


노트북 콜센터.
창고.
서버실 냄새.

번호가 붙은 노트북들.
사람 없이 물건이 가득 쌓인 방.


회사의 칭찬은 분명 달콤했다.
하지만 그 달콤함이
내 업무까지 따라오지는 않았다.

그날도 나는 노트북을 닦고
번호를 확인하고
고장 난 키보드를 바꾸고 있었다.


“인후야.”


조대리님이 불렀다.
웃고 있는데 눈이 웃지 않는 얼굴이었다.


“요즘 좀…
회사에서 네 얘기 나오더라.”

“네. 감사합니다.”


조대리님은 내 어깨로
가볍게 손을 얹을 듯 말 듯하다가
그냥 지나갔다.


그 말이 칭찬인지 아닌지는
나는 아직도 조금 헷갈렸다.




회의 투입


매일 나의 업무 루틴은 다양했다.

노트북 관리를 하다가도

한 번씩 일손이 필요할 때는 지원을 나갔다.


“너, 이거 좀 들고 들어와.”


조대리님이 서류철을 내 쪽으로 밀었다.


“오늘 행사 관련 회의 하나 들어가야 되는데 사람이 없네.”


여기서의 사람은 그 일은 회의를 기록하는 역할이었다.

회의실 안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JJ미디어의 tvM 팀 그리고 홍보팀 모습이 보였다.


tvM은 우리 그룹 산하 방송 채널이다.

오늘은 그들이 우리 공간에서 프로그램 홍보 행사를 열겠다고 왔다.


나는 제일 끝자리에 앉았다.
의자는 하나 남아 있었고, 그 자리는 딱 봐도
목소리를 내는 ‘참석자’가 아닌 ‘정리 담당자’의 자리였다.


조대리님은 띄워놓은 장표 속 공간을 훑어보며 말했다.


“조명 위치는 여기고요. 전선은 바닥 정리해야 합니다.
동선 겹치면 안 되고요.”


우리는 이 자리에 ‘공간 관리 담당자’로 와 있었다.

나는 그 옆에서 조용히 노트북을 펼쳐 대화를 기록했다.


이 회의에서 나의 역할,

듣고, 적고, 끝나면 나간다.

그게 오늘 내 역할이었다.




막히는 회의


tvM 팀장이 말을 이었다.

여성 팀장이셨다.


“이번 프로그램이 군인 컨셉이잖아요.

화제성이 필요한 만큼 제작발표회를
조금 다르게 가보면 어떨까 해요”


마케팅 장표에는
마케팅을 공부하며 보았던

익숙한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포토월

하이라이트 영상

기자간담회

컨셉 행사


홍보팀 담당자가 말했다.


“그런데 너무 튀면
괜히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어서요.

가뜩이나 요즘.. 저희 아시잖아요. 여기저기서 많이들 보고 있는 거.”


함께 자리한 tvM 마케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군인 프로그램이라 조심스럽긴 하죠.”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아이디어가 없는 정적이 아니라,
어디로 가야 할까 책임지고 말하고 싶지 않은 정적.


그때 조대리님이 이어갔다.


“뭐… 무난하게 가는 게 낫죠.”


그는 늘 그렇듯
딱 안전한 지점까지만 말했다.


“괜히 이상하게 튀었다가
기사 잘못 나면 누가 책임져요.”


그 말에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아이디어는요


이색적인 행사를 가느냐,

기존처럼 비슷하게 가느냐

계속 의견이 오갔다.


“그래서 뭐 아이디어 같은 게 있나요?”

“혹시 이번에 시도해 볼 만한 거 있을까요?”

“있으신 분은 누구라도 자리에서 좀 꺼내보죠.”


모두가 한 마디씩 거들었지만,

아이디어에 대한 말은 없었다.

이런 자리에서 자칫 잘못 말을 꺼냈다가는 공격을 받기 십상.

나는 노트북을 기록하다가 말의 공백에 손을 멈췄다.


이상했다.
이 회의에서 내 역할은 기록뿐인데,
머릿속에서는 계속 그림이 그려졌다.


입구.
위병소.
출입 검문.
보급품.


나는 모니터를 보던 고개를 사람을 향해 돌렸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죄송한데요.”


회의실 공기가 확 바뀌었다.

조대리가 내 쪽을 봤다.

그 눈빛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었다.


‘지금 네 차례 아니야.’




보급전문가


손이 떨렸지만,

나는 그래도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얼마 전까지 군대에 있었거든요.”


tvM 팀장님이 처음으로 나를 제대로 봤다.


“군인 프로그램이면 제작발표회를
단순한 ‘설명’ 말고 진짜 ‘입영’처럼 해보면
어떨까 싶어서요.”


누군가는 펜을 멈추었고,

모두가 나를 보았다.


“입구를 위병소처럼 만들고 명단 확인은
출입 검문처럼 하고요.”


말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기자분들 오시면 물 대신 군용 음료를
간식 대신 군대 비상식량을 드리고,
전투복이랑 수통, 지도 같은 것도
동선 따라 배치하면
좀 특별해지지 않을까요.”


“아, 그리고 입구에도

총 들고 헌병들이 서 있으면 더 좋고요.”


모두가 조용해졌다.


tvM 팀장님이 물었다.


“그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제가 얼마 전까지 군대 보급 쪽에 있었거든요.

필요하시면 사진도 공유해 드릴 수 있어요.”


그 말대로 이곳에서 노트북 창고일을 하기 전까지

내 일은 군 보급품을 관리하던 일이었다.


회의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엔 다른 종류의 정적이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는 분위기.




조대리가 또 박자를 두고 살며시 웃었다.

사람들 앞에서 쓰는
공식용 웃음이었다.


“인사팀에서 마케팅까지 하시네요.”

말투는 존댓말.
하지만 나는 알았다.

내키지 않는 표현이라는 것을.


tvM 팀장님은 조대리 옆에 앉은 내게 물었다.

“혹시 이거, 도와줄 수 있어요?

전문가가 함께해 주면 좋을 텐데.”


나는 잠깐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건.. 제가 결정할 위치는 아니어서요. ”


정확히 선을 그었다.

나는 결정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티 나면 안 되었기에.


“필요하시면
소품 준비정도는
도와드릴 수는 있습니다.”




회의가 끝났다.

사람들이 하나둘 나갔다.

조대리님은 서류를 챙기며 낮게 말했다.


“너 오늘 좀 튀더라.”


한 마디를 더 붙였다.

“이런 데서는 말을 항상 조심해.”


그리고 익숙한 말로 마무리된다.


“티 나게 하지 말고.”





남겨진 시선


나가는 길에 tvM 팀장님이 나를 불렀다.


“아까 얘기요.”


나는 멈춰 섰다.


“그거, 진짜 괜찮았어요. 꼭 기억해 둘게요.”


그 말은 칭찬처럼 들렸다.

기억해 둔다는 말과 함께 마음에 남았다.

그날 나는 별다른 결과물을 얻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의 머릿속에 남을 수 있었다.

심지어 그게 마케팅팀의 팀장님.


나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 인사팀 신입


회의실 문이 닫히고 사람들이 흩어졌다.

회의실에는 tvM 팀장과 마케터 둘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팀장의 노트에 써진 메모들.


제작발표회 = 입영소

입구 = 위병소

출입 검문 컨셉

비상식량, 총, 군복 준비..


팀장이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아까 그 친구 말이야.”


마케터가 노트북으로 정리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아, 인사팀이요?”

“응.”


잠깐의 침묵.

팀장은 방금 전까지의 회의를
머릿속에서 한 번 더 떠올리는 얼굴이었다.


“그냥 던지는 아이디어라기보다는…
진짜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더라.”


마케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짜 보급 쪽에 있었다고 했죠.”

“응. 그래서 디테일이 살아 있었어.”


팀장은 메모를 한 번 더 봤다.


“보통은
‘이렇게 하면 재밌을 것 같아요’에서 끝나는데.”

잠깐 멈췄다.


“그 친구는 디테일하게 그림을 그리고
‘이렇게 해야 실제로 된다’까지 말하더라.”


마케터가 웃었다.


“군대에서 그 일 해본 사람 아니면 절대 못 나올 말이죠.

그런데 해본다고 다 그렇게 말하는 것도 아니고요.”


팀장은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저런 애가 인사팀에 있는 게 신기하네.”

“인사랑 잘 맞을까요?”


팀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쨌든.”


잠깐의 숨.


“중요한 건 지금 저 친구는 저 팀 사람이라는 거지.”


마케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관심 있으세요?”


팀장은 즉답하지 않았다.

대신 물 한 모금을 마셨다.


“뭐, 아직은. 쓸모가 있다면?”


그리고 한 문장을 덧붙였다.


“근데 기억은 해둘 거야.”


마케터는 조용히 웃었다.


“이름이 뭐랬죠?”


팀장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초인후?”



아직 부르기에 익숙하지 않은 이름.

마케터가 메모장 한쪽에 작게 적었다.


초인후


그 이름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기록’되었다.






올해의 대상


연말이 가까워지면
사무실 공기는 묘하게 들떠 있었다.

연말행사 준비로 손이 필요해

하루의 절반은 사무실에서 일을 했다.


그것이 오히려 숨통을 트이게 해 주었다.

프린터는 평소보다 더 자주 울렸고
전화도 계속 울렸다.


행사 관련 정리된 문서가 팀에게 공유되었다.

나는 파일을 열었다.


사내 연말 행사의 수상자 명단이었다.


‘올해의 직원, 대상 – 기획팀 김상훈 팀장’


올해 흥행 영화를 제대로 한방 터뜨린 공으로

이미 몇 주 전부터 유력한 후보였다.


그때였다.



“어, 인후 씨.”


명단 속 김팀장님이 지나가다가 고개를 내밀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가벼웠다.


“오랜만에 보네. 잠깐 괜찮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팀장님.”

“아니, 일어날 필요는 없고.”


김팀장은 사무실을 한 번 훑어봤다.
사람들이 있는지.
누가 듣고 있는지.

프린터 옆에서 서류를 정리하는 조대리가 보였다.


김팀장님이 입을 열었다.


“그… 이번에 말이야.”


잠깐 멈췄다.

확신이 있는 사람 특유의 여유와
불안이 섞인 얼굴로

자신을 살며시 가리키며 말했다.


“..맞지?”


그 질문은

수상자의 신분을 확인하고자 하는
확인에 가까웠다.


나는 순간 머릿속이 빨라졌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것이다.

예정자 명단을 보았지만

아직 확정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대리가 저 옆에 있었다.


나는 김팀장님을 봤다.

부정하면 김팀장님의 자존심이 상할 거고.

긍정하면 나중에 뒤집힐 때 내 책임이 될 거고.

그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제가 잘 몰라서요. 죄송합니다.”

“그렇지? 자네는 모르겠네~ 알겠어. 수고하고!"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조대리님은 프린터에 종이를 넣으며 나를 한 번 흘깃 봤다.

그 눈빛이 ‘잘했다’인지 아닌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그날 오후 회의실을 지나다 조대리님이 김팀장에게
가볍게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 거의 정해진 거라던데요.”

“그래?”

기뻐하는 김팀장님 모습.


확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 말.


딱 그 정도가
조대리님의 언어였다.

책임을 지지 않을 만큼만 말하고
상대가 알아서 확신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결과발표


며칠 뒤,
회사창립 20주년 행사 현장.

사회자가 멘트를 읽었다.


“올해의 대상,
투자팀의 정철민 팀장입니다.”


순간 행사장 안의 공기가 살짝 흔들렸다.

정팀장님은 김팀장님의 라이벌로

올해 하나의 승진의 자리를 두고 경쟁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력한 승진의 무기인 '올해의 대상'의 자리는

정팀장님에게도 돌아갔다.


나는 김팀장 쪽을 봤다.

김팀장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흔들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그리고

사람이 분노할 때
더 차가워질 수도 있다는 걸
그날 알게 되었다.




누구의 말


행사 이후 전 직원 술자리가 있었다.

그다음 날 회사에는 말이 돌았다.


“어제 정팀장님이 3차까지 뒤풀이 제대로 사셨대.”

“김팀장 완전 빡쳤겠는데?”

“왜?”
“다 된 줄 알았는데.. 인사팀에서 잘못 흘렸대.”
“그게 누구래?”


며칠 뒤 그 말은 사실처럼 퍼졌다.


“인사팀 신입이 먼저 흘렸다는데.”
“걔, 말 많다며.”
“선 넘는 스타일이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말한 사람은 내가 되어 있었다.


조대리가 내 자리 옆에 섰다.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회사 생활 그렇게 하면 안 돼.”


여느 때처럼 나오는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회의실에서 조대리와 김팀장님이 이야기 나누던 모습이 그려졌다.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그걸 왜 네가 판단해.”


마치 내가 말한 일처럼 되어 있었다.


“회사에서 말 나오는 거 알지?

다음부터는 말 조심해. 티 내지 말라고.”


그 말은 충고가 아니라 명령이었다.

이상하다.

그날 김팀장님이 물었을 때

나는 분명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오후 조대리님의 입에서 나온 건 잘못 들었던 걸까?


나는 별 말을 할 수 없었다.

질문에 미소를 지은 건 나였으니까.






팀 회의실에서 공기가 달라졌다.


“노트북 재고 관련 문제점이 있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말을 꺼내면
사람들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그건 조대리한테 먼저 이야기하세요.”


남팀장님의 말이 몇 번이나 반복됐다.

나의 말은 그 자리에서 통과되지 않았다.

나는 이미 가벼운 존재가 되어 버린 걸까.


말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고,

말하면 더 큰 문제가 되는 사람.


미운털이라는 건
눈에 보이지 않아서
더 무서웠다.


그리고 다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상상도 못 했던 순간이었다.


태어나서 이제까지 한 번도

마주하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 눈앞에 나타나게 되었다.




(2.2 - 몸치의 리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