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나만 휴먼

지난 이야기 - 죽고 싶은 생각 15% 감소



민수와 유연을 본 뒤로,

나는 며칠 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대시보드를 열 때마다 두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각자의 방, 각자의 파란 불빛, 각자의 가짜.

내가 만든 것이 두 사람을 가둬놓고 있었다.

그런데 회사는 그 숫자를 성과라고 불렀고, 나는 그 성과를 만든 사람이었다.


누군가한테 묻고 싶었다. 이게 맞는 건지.

우리가 만드는 게, 정말 사람을 위한 건지.


그런데 그 누군가가, 희영님밖에 없었다.

그날 밤, 나는 희영님한테 화상을 걸었다.

늦은 시간이었는데, 희영님은 받았다.


"AI 에코 연구하다가 떠오르는 생각은 언제라도 연락 주세요."

그녀의 말이었다.


이건.

AI 에코와 관련된 얘기니깐,

연락해도 되는 일이었다.


화면 속 희영님은 평소와 같은 자리에 있었다.

같은 배경, 같은 조명. 그리고 같은 옷이었다.

검은색 니트. 언제나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었다.


문득 떠올려보니 한 번도 다른 옷을 본 적이 없었다.

나도 회색 후드만 입으니까.

그녀도 옷에 관심이 없는 사람인 걸까. 나처럼.

"인후 씨, 무슨 일 있었어요? 얼굴이 안 좋아요."

희영님이 먼저 물었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민수 얘기를 꺼냈다.

친구가 AI 에코에 빠져서 몇 달째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내가 찾아갔는데 나를 밀어냈다고.

어쩌면 내가 만든 게, 친구를 그렇게 만든 것 같다고.

.

희영님은 조용히 들었다.

중간에 끊지 않고.

내가 말을 다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희영님이 입을 열었다.


"인후 씨 잘못이 아니에요. 인후 씨는 사람을 위한 도구를 만든 거예요. 그걸 어떻게 쓸지는 사람들이 정하는 거고요."

"그 도구가 사람을 가두는데도요?"


희영님이 잠깐 말이 없었다.

그리고 조금 다른 톤으로 말했다.


"인후 씨는, 참 잘 짜여진 사람이에요."

나는 화면을 봤다.

"…네?"

희영님이 한 박자 늦게, 덧붙였다.

"아, 그러니까. 생각이요. 인후 씨는 생각이 참 잘 짜여 있어요. 남 걱정을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이, 요즘 어디 있어요."

"…아."


나는 웃었다. 좋은 뜻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잘 짜여진 사람.

어딘가 이상한 표현이었다.

생각이 잘 짜였다는 건 알겠는데 사람이 잘 짜였다는 건 이상했다. 뭔가 조립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희영님은 머릿속도 연구원 같다.

항상 연구원 같은 말투를 쓴다.

누구나 자기만의 습관이 있으니까,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인후님."

"네."

"맨날 똑같은 옷만 입으시네요."


나는 웃으며 답했다.

"희영님도 그런데요?"

"좋아하는 거라서요. 그리고. 새로운 거 고르는 것도 번거로워서."

"저랑 똑같네요."


둘은 웃으며 서로의 옷을 바라봤다.

그녀의 검은 니트, 나의 회색후드.

우리의 미팅 속 의상은 언제나 같았다.


희영님은 언제나 그 의상처럼 한결같았다.

언제 말을 걸어도, 희영님은 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를 항상 받아주는 사람.

그 자리에 있는 사람.

가끔 이상한 표현을 쓰는 사람.


그리고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





며칠 뒤, 나는 본부장님한테 보고서를 하나 올렸다.


AI 에코의 위험성에 대한 거였다. 사용자 이탈이 아닌, 사용자 고립에 대해 언급하며. 체류 시간이 길어지는 게 성과가 아니라 위험 신호일 수 있다고.


밤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답장은 1분도 안 돼서 왔다.


[본부장]: 좋은 지적이에요, 인후 씨. 역시 인후 씨는 사용자를 제일 잘 이해해요.


나는 시계를 봤다.

밤 11시 12분.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이상한 걸 느끼고, 넘기고, 또 느끼고.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일 줄 알았다.


그날도 야근이었다.


전에도 그랬다. 내가 몇 시에 보고서를 올리든, 본부장은 늘 1분 안에 답했다. 새벽 2시에도, 3시에도. 마치 내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아니, 내 메시지가 오는 순간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 사람은 잠을 안 자나.

언젠가 은빈님한테도 똑같이 느꼈던 생각이었다. 은빈님도, 우람님도, 우정님도, 다들 잠을 안 잤다. 그리고 이제 보니 본부장님도 그랬다. 팀장님도 그랬다.


이 회사 사람들은 아무도 안 잤다.

나만 빼고.


요즘 시대에 청년 중에 일을 시작하는 사람은 열 명 중 하나라고 한다. 나머지 아홉은 예전의 나처럼 살았다. 일할 이유가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방을 주고. 월 300만원을 주니까.


그런데 이 회사 사람들은, 그럴 이유가 없는 시대에, 잠도 안 자고 주말도 없이 일했다. 마치 일하는 것 말고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처럼.


일이 전부인 걸까.

너무 멀리 갔다.

민수 일로 예민해진 거다.


일을 열심히 하는 회사 사람들을 두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거다.

사람을 두고 이상하다고 의심하는 건, 실례를 넘어서 이상한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넘겼다.

그렇게 고민하며 한 손으로 펜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 떨어진 펜이 책상 밑으로 굴러 들어간다.


의자를 뒤로 빼고, 몸을 숙여서 손을 뻗었다.

펜을 잡으려는데, 책상 밑판에 뭔가가 보였다.


매끄러운 표면에, 거친 부분. 손끝에 걸리는 감촉. 나는 펜을 쥔 채로, 그 부분을 다시 만졌다.

긁힌 자국이었다.

누가 뭔가를 새겨놓은 것 같았다. 나는 몸을 더 숙여서, 책상 밑을 들여다봤다. 긁혀 있어 한눈에 보이지 않았다. 폰을 켜 조명을 비췄다.


숫자였다.

날카로운 걸로 긁어서 새긴 세 개의 숫자.




023



나는 그 숫자를 봤다.


누가 이걸 여기에 새겼을까. 왜.

책상 밑에, 아무도 안 보는 곳에.

손톱으로는 안 되고, 뭔가 뾰족한 걸로 여러번 긁어야 나올 자국이었다.

그냥 보면 숫자인 줄도 모를 모양.


들키지 않으려고..?

누가 이걸 왜, 여기에?


이 자리에 나 말고 앉았던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준노씨.


나는 책상 밑에서 몸을 빼지 못한 채로, 한참 그 숫자를 봤다.

준노씨가 새긴 걸까. 끌려나가기 전에. 뭔가를 남기려고. 그런데 왜 하필 숫자였을까. 023이 뭘까. 무슨 뜻일까.


준노씨가 마지막으로 하려던 말이 떠올랐다.


"여기 좀 이상하지 않아요?"


그때 준노씨는 뭔가 더 말하려다 멈췄다. 삼키던 말이 있었다. 나는 그게 뭔지 끝내 못 들었다.

혹시 이건가. 준노씨가 하려던 말이, 이 숫자였나.


말로는 못 하고, 이렇게 긁어서라도 남긴 건가.

누구한테.

다음에 이 자리에 앉을 사람한테.


바로 나한테.

나는 손끝으로 그 세 개의 숫자를 천천히 만졌다.


지금까지 넘겨온 모든 것들이 이 숫자 앞에서 멈춰섰다.

같은 옷도, 잠 안 자는 사람들도 전부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못 넘겼다.

이건 일부러 남긴 거다.

내 착각이 아니었다.


누군가 여기에, 진짜로, 뭔가를 남겨두었다.


준노씨.

뭘 전하려고 했던 걸까.


회사에서 나만 휴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