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나만 휴먼

지난 이야기 - 책상 밑의 숫자



그날 밤,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023을 생각했다.


책상 밑에 새겨진 세 개의 숫자.

준노 씨가 나한테 남긴 것 같은.


눈을 감으면 그 자국이 떠올랐다.

뾰족한 걸로 오래, 급하게 긁은 흔적.

들키지 않으려고 아무도 안 보는 곳에.

준노씨는 뭘 말하려던 걸까.


나는 폰을 들어 ‘023’을 검색했다.

지역번호, 코드, 게임 아이템.

검색 결과는 많았지만, 준노 씨와 연결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당연했다.

세 자리 숫자가 무슨 의미인지, 검색으로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숫자가 낯설지 않았다.

어디서 본 것 같았다.


023.


분명히 어딘가에서.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나는 책상 밑을 다시 확인했다.

혹시 어젯밤에 잘못 본 건 아닐까.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의자를 빼고, 몸을 숙이고, 폰 조명을 켰다.


그대로 있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나는 손끝으로 다시 만졌다.

어젯밤과 똑같은 감촉. 긁힌 자국.

진짜였다.


몸을 일으키다가, 문득 준노씨가 생각이 났다.

끌려나가던 마지막 날.

그날도 평범하게 시작됐다.

준노씨는 아침부터 회사 욕을 했다.

여느 때처럼.

점심을 먹고, 오후에 뭔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이 하얀 방에 사람이 들어온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리 둘 말고, 다른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두 명이었다.

정장을 입은 보안 담당자들. 이상한 건, 그 사람들 얼굴이 기억이 안 난다는 거였다. 분명히 봤는데. 눈앞에서 봤는데. 그 사람들이 준노한테 다가갔고, 준노씨는 영문도 모른 채 끌려나가기 시작했다.


"뭐예요? 내가 왜?"

준노씨가 소리쳤다.

"내가 왜 나가야 하냐고!"


준노씨는 버텼다. 책상을 붙잡고 외쳤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냥 보고 있었다.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양팔을 잡힌채로 발버둥치며 책상 아래를 발로 찼다.

늘 웃는 준노씨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 마지막 순간에, 준노씨가 나를 봤다. 분명히 나를 본 것 같았다.

뭔가 말하려는 것 같았다. 입이 움직였다. 그런데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준노씨는 끌려 나갔고, 문이 닫혔다.


다음 날, 계약 종료 메시지를 봤다.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이 공간에 나 말고 누군가 있었던 건.



나는 그 기억을 떠올리며, 책상을 다시 봤다.

준노씨가 붙잡았던 책상.

끌려나가면서도 놓지 않으려던 책상.

그 밑에 023이 새겨져 있었다.


혹시 그때였을까.

준노씨가 책상을 붙잡고 버티던 그 순간에, 새긴 게. 아니, 그건 불가능했다. 그렇게 짧은 순간에 이런 자국을 남길 수는 없었다. 이건 오래 긁어야 나오는 자국이었다.


그럼 그전에. 며칠에 걸쳐서. 아무도 모르게.

준노씨는 알고 있었던 걸까. 자기가 끌려나갈걸.


그래서 미리 남겨둔 걸까.

내가 오기 전부터?


다음 사람을 위해서.

나를 위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커피를 쏟았다.


손이 미끄러졌다. 컵이 넘어가면서 책상 위로 커피가 번졌다. 나는 급하게 휴지를 뽑아서 닦았다. 책상 모서리 쪽으로 흘러 들어간 건 손이 안 닿아서 그냥 뒀다. 어차피 마르면 그만이니까. 나중에 얼룩이 남으면 그때 닦지 뭐.

그러고는 잊어버렸다.

일이 밀려 있었으니까.


퇴근할 때였다.

노트북을 덮고 일어서다가, 무심코 책상을 봤다.

깨끗했다.

얼룩이 없었다. 아까 손이 안 닿아서 그냥 둔 부분도. 흘러 들어간 자리도. 마른 자국조차 없었다.


나는 잠깐 서서 책상을 봤다.

손끝으로 그 자리를 만져봤다. 매끄러웠다. 아무것도 없었다. 커피를 쏟은 적이 없는 책상 같았다.

내가 생각보다 잘 닦았나.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분명히 대충 닦았는데.


커피는 마르면 자국이 남는다.

적어도, 티는 난다.

아니면 자리를 비웠을 때 누가 와서 닦아줬나.


이 방엔 나뿐이었다. 두 달 넘게 출근하면서, 청소하는 사람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루 종일. 늘 나뿐이었다.



그럼, 무엇이 지운 걸까.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방을 둘러봤다.

하얀 벽. 형광등. 의자 두 개. 창문 없음.


늘 보던 방이었다. 두 달 넘게 매일 출근한 방.

그런데 지금은, 이 방이 낯설게 느껴졌다.

커피 자국이 사라지는 방.

그게 가능한 공간이 뭐가 있지.

머릿속에서 뭔가가 스쳤다. 023이 낯설지 않았던 것처럼. 어딘가에서 본 것 같았는데. 커피가 사라지는 공간. 흔적이 리셋되는 공간.

이런 게 가능한 곳이, 한 군데 떠올랐다.


글래스 안. 에코가 사는 곳. 거기서는 뭘 흘려도 얼룩이 남지 않았다.

꺼졌다 켜지면, 모든 게 처음으로 돌아갔다.

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글래스는 없었다. 맨눈이었다.

그런데 커피의 흔적이 사라졌다.


나는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머리가 아파왔다.

그 생각의 끝까지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거기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게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요즘은 내 몸의 감각이 자꾸 낯설었다. 가끔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뜨거운 것을 잘 느끼지 못하고, 가끔 피가 나지 않았다.

나는 책상 밑을 다시 만졌다.


023


준노씨는 먼저 알았던 거다. 이 방이 이상하다는 걸. 아니, 이 방만이 아니라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그래서 남긴 거다. 말로는 못 하고, 긁어서라도.

나한테.

나는 그 숫자를 손끝으로 계속 짚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다 넘겼다. 이상한 걸 느끼고, 넘기고, 또 느끼고. 그냥 넘기는 게 편했으니까.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준노씨는 넘기지 않았다.

넘기지 않아서 끌려나갔고, 끌려나가기 전에 이걸 남겼다. 다음 사람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럼 나는, 뭘 해야 하나.


023이 무엇인지, 나는 알아야 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회사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


노트북을 열고,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걸 열었다.

AI코퍼레이션 사내 인트라넷.


검색창에 커서를 올렸다.

그리고 세 글자를 입력했다.


강준노



회사에서 나만 휴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