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마케터 3장 - 이 시대 기타왕
3.1 - 회사는 사라지고, 사람은 남는다
회사의 변신
회사 로비에는
전 직원이 모여 있었다.
자리가 모자라 벽에 기대 선 사람들도 보였다.
왕정아 대표님은 예상보다 훨씬 차분한 얼굴로 단상에 섰다.
모두에게 흘러나왔던 이야기,
중대한 회사의 발표가 있는 순간이었다.
웅성임이 잦아들자
대표가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은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 말 한마디에 공기가 달라졌다.
이 회사에서 ‘중요한 이야기’라는 말은
대개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오늘부로
JJ엔터테인먼트는 사라집니다.”
순간,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강당 여기저기서 들렸다.
누군가는 고개를 들었고,
누군가는 고개를 숙였다.
회사가 사라진다니.
…이제 실직자인 건가?
아니면.
대표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천천히 이어갔다.
“영화를 만드는 우리 JJ엔터테인먼트부터
방송 JJ미디어,
음악 JJ뮤직,
게임 JJ게임즈까지
그룹의 모든 미디어 회사들이 통합해
‘JJ미디어 컴퍼니’ 하나의 회사로 새롭게 시작합니다.”
웅성임이 커졌다.
4개의 회사가 합쳐서 하나의 회사가 되는 건
대한민국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옆에 있는 조대리는 처음 듣는 얼굴이었다.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김과장님도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갸웃했다.
남팀장만이 조금 늦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팀장님은 알고 있었구나.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 거였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는 더 커집니다.
이제부터 대한민국 최대 미디어 회사가 됩니다."
왕정아 대표님은 영화사업의 부문대표가 되셨고,
JJ그룹의 대표님이 JJ미디어 컴퍼니 통합 대표로 오셨다.
그날, 100명짜리 회사는
하루아침에 3,000명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속했던 팀도
JJ미디어 컴퍼니 인사실로 통합되었다.
5명의 팀이 30명의 실로.
여러 생각이 맴돌았다.
게임에서 첫판이 죽으면 다시 시작하지만,
사회생활을 그렇지 못한다.
그런데 나는 다시 시작이다.
하나의 회사가 되면
사람도, 일도 전부 바뀐다.
평소와 다르게 생각이 복잡해 보이는 조대리의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본인의 미래를 위한 그림을 다양하게 그리고 있겠지.
굿바이, 조대리.
내 첫 사회생활의 상처와 기억이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아,
조금은 시원하면서도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회사가 통합이 되면
다른 일을 하게 되겠지?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나는.
그 상상은 기대보다는
불안에 가까웠다.
일의 변신
여러 회사의 통합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메일함은
이름 모를 사람들의 메일로 가득 찼고,
사내 메신저에는
새로운 프로필 사진들이
쉴 새 없이 떴다.
많은 이들이 떠나갔고,
많은 조직변화들이 일어났다.
윤과장님.
박대리님.
새로 함께하게 된 팀의 사람들이었다.
인사실은 5개의 세부역할로 나눠지게 되었고,
나는 ‘평가보상’이라는 이름의 부서로 배정되었다.
나는 3인으로 된 파트의 막내였다.
새롭게 합쳐진 첫날,
윤과장님의 첫인상은 무뚝뚝해 보였다.
“인후 씨죠? 앞으로 잘 부탁해요.”
웃는 얼굴이었다.
억지스럽지 않은 자연스러운 웃음.
박대리님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잘 부탁드려요.”
나의 첫 여성 사수다.
그리고 거의 의례처럼
윤과장님으로부터 그 질문이 나왔다.
“인후는 나중에 뭐 하고 싶어요?
꿈이 뭐예요?”
또 그 질문이다.
왜 회사는 꿈만 물어보는 걸까.
헌법 1조 1항에
이 질문이 들어 있나 보다.
그러나 나는 이미 경험이 있다.
“아직은 제가 잘 몰라서
열심히 일하면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마음속에 하고 싶은 일들은 있었다.
다만 꺼내지 않을 뿐이었다.
사실, 첫날의 꿈 질문과 달라진 건 없었다.
달라진 건 내 입에서 꺼내진 대답뿐이었다.
나의 진짜 꿈은 어느 순간부터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윤과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말 놓아도 되죠?"
"네. 편하게 말씀 주세요."
"나는 말이야,
나중에 은퇴하면…”
그리고 그 이야기는
한 시간을 넘겼다.
그것은 회사 이야기가 아닌
본인의 마음속 꿈이야기였다.
먼 훗날 하고 싶은 개인사업,
가꾸고 싶은 텃밭과 전원주택 그리고..
처음엔 웃으며 듣다가
중간부터는 고개만 끄덕였다.
조용한 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래도…
나쁜 분은 아닌 것 같다.
제2의 시작
그렇게 하나의 회사로 합쳐지고 8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3개월째,
윤과장님께 처음으로 "잘했어"라는 말을 들었다.
5개월째,
박대리님께 "인후는 데이터를 사람처럼 잘 본다"고 말씀 주셨다.
7개월째,
처음으로 내 기획안이 통과됐다.
그렇게 일에 조금씩 적응하며 나아가고 있었다.
회사의 통합 후 첫해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내가 맡은 일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이었다.
사람들의 평가, 보상, 배치.
드러나지 않는 일을 했다.
회의실이 아니라 주로 방 안에서 데이터로.
노트북 번호 대신 사람의 숫자를 다뤘다.
평가등급, 연봉, 인센티브 보너스.
서버실에서 데이터실로 옮겨온 셈이었다.
나, 일단은 살아남은 걸까?
노트북 데이터 대신 사람의 데이터를 다뤘고
그때는 혼자였지만 이제는 함께다.
새로운 일에서는 나를 적당히 감춘 채로
필요한 일을 하며, 필요한 말을 하며
잘 지내올 수 있었다.
데이터로 하는 업무는 처음엔
익숙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손에 점점 맞아갔다.
윤과장님, 박대리님과 함께하는 시간도 괜찮았다.
윤과장님은 틈만 나면 은퇴 후의 이야기를 꺼내셨다.
박대리님은 데이터를 정리하고 시각화하는 것이 뛰어났다.
첫 사회생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하루하루를 고민하던 시기.
지금 이곳에서는 조금씩 커져간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데이터실 안에서 보내야만 했다.
이곳이 앞으로 내가 계속
나아가야 하는 곳인지는 마음 한켠에 궁금함이 들었다.
그 답을 아직은 알 수 없었다.
JJ엔터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냐고?
함께했던 남팀장님은 다른
그룹 계열사의 팀장으로 가셨다.
떠나기 전 마지막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래. 보상 쪽 일 한다고?
거기 가서도 너무 튀지는 말고.”
조대리님은 같은 인사실에서 컬처파트를 맡아
사람을 열심히 만나는 일을 한다.
다행인지 컬처파트와 평가보상은 자리의 끝과 끝,
의식하면 마주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
그리고 김과장님은 여전히 같은 일을 하며
가끔 한 번씩 술자리에 불러내 술 한잔씩 사주시곤 하였다.
JJ엔터테인먼트가 사라졌다.
누군가는 떠났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남아있다.
8개월 사이 많은 것이 변했다.
미운오리새끼
어느 날,
윤과장님이 의자를 돌려
나를 불렀다.
“인후야, 이번 주 목요일에 뭐 해?”
“특별한 건 없습니다. 필요한 거 있으세요?”
“그날 저녁에 tvM팀 회식이 있는데 인사팀에서 둘 가야 한대.
요즘 위에서 현업부서랑 밀착해서 지내라고 강조하시잖아.
같이 가자.”
tvM.
회사 안에서 가장 애매한 이름이었다.
공중파를 잡겠다고 만든 TV 채널.
전에는 TV로만 보던 채널을 이제는 데이터를 보다 보니 알게 되었다.
투자는 많았지만, 성과는 적었다.
적자채널이었고, 시청률은 지지부진했다,
자극적인 프로그램으로 논란이 많았고, 기대감은 적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미운오리새끼 같은 존재였다.
“네. 알겠습니다.”
회식 자리는 예상과 달랐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밝았다.
실적이 안 좋다는 팀인데 표정에는 생기가 있었다.
기존에 가졌던 회식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다.
일 이야기로 시작해서, 일 이야기로 가득했던 시간.
윗분들의 좋은 말씀으로 가득했던 시간이었다면,
이곳은 흥미로운 이야기로 채워졌고, 아이디어도 가득했다.
누구는 어제 본 광고 이야기의 포인트를
누구는 망한 기획의 경험을
누구는 진격의 거인 만화를 이야기했다.
마치 대학교 때 동호회 뒤풀이 때 시간처럼.
그때는 나도 광고 이야기를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말하고,
만화와 영화 이야기에 한껏 빠져 있던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이상하다.
실적이 엉망인 곳인데..
왜 이렇게 업 되어 보이지?
데이터 대로 ‘실패한 채널’이 아니라,
눈앞의 사람들은 생동감이 있었다.
그날의 분위기가
오랜만에 가슴을 조금 움직였다.
술이 들어가자 대화는 더 뜨거워졌다.
어느새 2차,
누군가가 마이크 대신
소주병을 들고 노래를 불렀다.
게임의 벌칙이란다.
“인후님은 인사팀에서 무슨 일 하세요?”
“평가보상입니다.”
“아, 그래서 그렇게 반듯하셨구나.
되게 정리된 사람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정리된 사람이 ㅎㅎ.
인사팀에 잘 보이려고 멘트 아주.”
그 사람들의 대화에 웃음이 났다.
같은 테이블의 둘은 tvM의 마케터들이었다.
큰 키의 소유자. 흥 많은 이우람님,
술이 들어가니 텐션이 올라간다.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하우정님.
돌돌 말아 묶은 머리에 리액션이 꽤나 찰지다.
그리고 취기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그거 알아요? 저.. 사실
마케터가 되고 싶었어요.”
순간 자리가 조용해졌다.
호기심 많아 보이는 우정님이 되묻는다.
“진짜요? 왜요?”
“뭔가…
아이디어 짜서 현실로 꺼내고
사람들 일상을 재밌게 만들어주고
그게 멋있잖아요.”
잠깐의 정적 뒤에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우정님, 우람님의 연공.
“아 오글거려!”
“인후님 취했네!”
나도 민망함에 웃었다.
“아. 취했나 봐요 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한동안 속 안에 감춰둔 이야기가
나도 모르게 꺼내질 뻔했다.
역시 술이 문제였다.
tvM 마케터
테이블에 모둠전이 올라오고
소주병이 금세 또 또 한 병이 빈다.
우람님이 소주를 따라주며 이야기를 꺼낸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
“네?”
“저희 초면 아닌 거.”
“기억나요. 전에 회의 때 같이 뵀었잖아요. 제작발표회 행사 준비로요.”
예전 행사 회의 때 tvM 팀장님과 함께 있었던 분.
우람님을 기억하고 있었다.
“오. 기억하시네요? 그날 아이디어 말씀 주셨잖아요.
끝나고 팀장님이 뭐라 그랬는지 알아요?”
"뭐라고 하셨었는데요?"
우람님의 말에 바로 옆, 우정님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묻는다.
“이건 현장 경험 없으면 못 나오는 거예요.
캬. 이러셨던 거 있죠.”
"와 람님. 팀장님 말투 똑같애. ㅎㅎ"
순간 잊혀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생각지 못했던 반응에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웃기만 했다.
“아. 그냥 순간 생각난 거였어요.
제가 잘 몰라서 그냥 막 던진 거죠.”
“와. 대박. 그게 제일 무서운 말인 거 알죠.
그냥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이거”
옆에 있는 우정님이 웃는다.
“아니 근데 진짜.
위병소 입구부터 비상식량까지
너무 디테일하지 않았어요?”
“나 솔직히 그거대로 하면서 긴가민가 했는데
그날 기사 뜨는 거 보고 좀 소름 돋았잖아요.
반응이 되게 좋았어요.”
“아, 진짜요…?”
잠깐의 공백.
나는 애써 민망함에 짠을 권한다.
아무래도, 칭찬은 익숙하지 않은가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