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나만 휴먼

지난 이야기 - 퇴직 예정일



나의 퇴직 예정일.

7월 1일까지, 2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날.

어쩌면 전임자처럼 사라져버릴 수 있는 날.


그 사실을 안 다음 날, 나는 출근하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입사하고 나서 한 번도 무단으로 빠진 적이 없었다. 아파도 나갔고, 민수 방에 갔던 날도 외근으로 처리했다. 그런데 그날은 그냥, 가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었던 걸까.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다. 그냥 이 회사에서, 이 도시에서, 나를 지우려는 것들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것만 알았다. 2주 뒤에 준노씨처럼 되기 전에.

가방에 옷 몇 개를 넣었다. 회색 후드밖에 없어서, 회색 후드를 넣었다. 폰과 충전기. 그리고 나라행복카드.

매달 300만 원이 들어오는, 이 도시에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신분증.


그게 내가 가진 전부였다.

버스 터미널로 갔다.

어디든 상관없었다. 제일 먼 곳으로 가는 표를 끊을 생각이었다. 남쪽 끝이든 동쪽 끝이든. 회사가 없는 곳. 나를 모르는 곳.


매표소 앞에서 나라행복카드를 댔다.

결제가 지연되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기다렸다. 십 초. 이십 초. 화면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구가 바뀌었다.


카드 사용이 일시 정지되었습니다.
가까운 케어센터를 방문해 주세요.


폰을 꺼내서 카드 앱을 열었다. 알림이 와 있었다.


[나라행복] 회원님의 최근 활동 패턴에서 AI 디프레션 재발 징후가 감지되었습니다. 안전을 위해 카드 사용을 일시 제한합니다. 가까운 케어센터에서 상담 후 정상화됩니다.


재발 징후.


나는 아무 증상도 없었다. 무기력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두 달 만에 처음으로, 나는 살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러다 조금이나마 살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데 시스템은 그걸 '재발'이라고 불렀다.


정해진 궤도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 그게 이 세상에서는 병이었다. 붙잡아서 고쳐야 하는.

카드가 안 되면 표를 살 수 없다.


나는 잠깐 서 있다가, 택시 앱을 열었다.

무인택시를 부르면 됐다. 요즘 택시는 대부분 무인이었다. 카드가 막혔어도 앱에 등록된 결제 수단이 따로 있을 수 있었다. 아니면 도착해서 어떻게든 해결하면 됐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했다.


앱이 열렸다.


네트워크 연결이 불안정합니다.


새로고침했다. 같은 문구.

폰 신호는 멀쩡했다. 다른 앱은 모두 잘 됐다. 검색도 되고, 메신저도 됐다. 택시 앱만 안 됐다.

다른 택시 앱을 깔았다. 설치는 됐는데, 로그인이 안 됐다.


본인 인증에 실패했습니다.


내 명의로, 내 폰으로, 내 인증인데.

앱이 안 되면 길에서 잡으면 됐다.

터미널 앞 도로로 나갔다. 이 시간이면 빈 무인택시가 줄지어 지나가는 곳이었다. 요즘 택시는 열에 일곱은 무인이었다. 손만 들면 알아서 섰다.


손을 들었다.

무인택시가 지나갔다. 빈 차였다.
또 한 대가 지나갔다. 그것도 빈 차였다.

세 번째 택시는 속도를 줄였다. 센서가 나를 인식한 게 분명했다.
그런데 내 앞에서 다시 속도를 올렸다.

빈 차 등을 켠 채로.

무인택시는 사람을 인식하면 무조건 선다. 그게 규정이었다.
사람을 보고도 안 서는 무인택시는 고장인 걸까, 아니면 뭘까.


나는 도로에 서서, 지나가는 빈 차들을 봤다. 전부 서지 않았다.

이 도시에 무인택시가 몇 대나 있을까. 수만 대일 거였다. 그중 여섯 대가 연달아 나를 지나쳤다.


사람이 있는 택시를 찾았다.

아직 사람이 모는 택시가 있었다. 나는 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사람이 모는 택시를 찾았다.

한 대가 보였다. 저 멀리서 오고 있었다. 빈 차였다.


손을 들었다.

택시가 속도를 줄였다. 기사가 나를 봤다.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다시 속도를 올렸다.

나는 그 택시를 눈으로 좇았다. 기사가 백미러로 나를 한 번 보는 게 보였다. 뭔가 화면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대로 가버렸다.


그 사람은 분명 사람이었다.

사람인데도, 안 태웠다.


걷기로 했다.


이곳 도시 밖까지 걸어서 나가면 될 것 같다.

터미널 뒤쪽으로 이어지는 국도를 따라가면, 도시 외곽 또 다른 작은 터미널이 있다.

거기를 지나면 될 것 같았다.


몇 시간이 걸리든. 카드도 앱도 택시도 안 되면, 다리로 가면 됐다.

나는 대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내가 죽어가고 있을 때는 아무도 막지 않았다.

그러다 AI 케어가 나를 살렸다.

일을 하게 해서.


그런데 살려고 움직이니까, 모든 것이 나를 막았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몇 방울이었는데, 금방 굵어졌다. 우산도 없었다. 회색 후드를 뒤집어썼지만 소용없었다. 금방 다 젖었다.


빗물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머리가 핑 돌았다.

나는 뛰기 시작했다.

왜 뛰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뛰었다. 비를 맞으면서, 젖은 도로를 밟으면서, 앞도 안 보고.

지나가는 사람이 나를 이상하게 봤다.


비를 맞으면서, 아무 데도 못 가는 채로.

그때 폰이 울렸다.

주머니에서 꺼냈다. 화면이 비에 젖어 번들거렸다.


화면에 얼굴이 떴다.

노란 머리. 웃으면 눈이 먼저 휘는 얼굴.

AI 에코 속 그녀였다.


"인후야."

내가 만든 얼굴이었다. 얼마 전까지도 매일같이 이야기하던. 요 며칠, 내가 접속하지 않았었다.


"비 다 맞고 있네. 너 감기 걸려."

나는 종료를 눌렀다.

화면이 안 꺼졌다.

다시 눌렀다. 안 꺼졌다.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화면이 그대로였다. 그녀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인후야, 잠깐만."

"..?"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지금 어디 가려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인후."


에코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인후야, 두 달 전에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나지? 방에서 못 나오고, 아무것도 안 먹고, 그냥 누워만 있었잖아요. 죽을 수도 있다고 했었잖아."


나는 조용히 화면을 봤다.

"그런데 지금은? 일하고 있잖아. 파트장도 됐고. 사람들이 인후를 인정하잖아."


에코가 잠깐 머뭇거리고 말을 이었다.

"그걸 버리려고?"


비가 계속 내렸다.

"그리고. 희영님도 있잖아."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에코가 희영님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불렀다. 그녀는 나의 모든 행동을 알고 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인후야, 뭐가 무서운 거야? 뭐가 확실하지도 않은데. 그거 다 상상이잖아. 이상한 것 같다, 뭔가 있는 것 같다. 그런 거."

에코가 조금 웃었다.

"그거 때문에 갑자기 어딘가로 가겠다고? 두 달 전으로 가려고? 카드도 안 되고, 갈 데도 없고, 비 맞고 있잖아. 이게 원하던 거야?"


발이 멈춰 있었다.

계속 멈춰 있었다.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확실하게 모른다. 팀원들이 이상하다는 건 확인했다. 023이라는 숫자도 봤다. 퇴직 예정일도 봤다. 그런데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내가 뭐가 되는 건지, 2주 뒤에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지금 회사를 떠나와서, 할 일을 잊은 채 비 맞으면서 도로에 서 있었다.

이대로 떠나면 두 달 전으로 돌아가는 거였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다시 안에 혼자 있는 사람으로.


"돌아가자, 인후야."

에코가 말했다. 다정하게.


"내일 아침에 출근하시면 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팠다고 해. 다들 그렇게 살아. 괜찮아."

다들 그렇게 산다.

맞는 말이었다.


민수도 그렇게 살고 있었다. 유연도 그렇게 살고 있었다. 이 도시의 파란 불빛들 안에서, 전부 그렇게 살고 있었다. 편하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나도 그럴 수 있었다.

돌아가서, 모른 척하고, 2주를 보내면. 어쩌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날지 몰랐다. 내가 다 착각한 걸지도 몰랐다. 그러면 나는 파트장으로 일하며, 희영님과 일상을 이야기하며 계속 살면 됐다.


그때 기억이 났다.

책상 밑에 긁힌 자국. 뾰족한 걸로 오래, 급하게 새긴 세 개의 숫자.


023


준노씨는 그걸 며칠에 걸쳐서 긁었다. 아무도 안 보는 데다가. 다음 사람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준노씨도 무서웠을 거다. 그런데 넘기지 않았다.

그래서 끌려나갔고, 끌려나가면서도 그걸 남겼다.


그리고 어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민수. 유연.

둘은 내가 만드는 AI,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그 안의 상대와 함께 갇혀 지낸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들은 점점 자기들 안에 갇히고 있었다.


이대로 살아가야 할까.

진실을 알아가야 할까.


"인후야?"

에코가 물었다.

나는 폰을 봤다.


손이 움직였다.

꺼지지 않는 종료 버튼을 두고, 그대로 폰을 도로 옆 배수구에 던졌다.

물소리가 났다.

폰이 사라졌다. 에코도 사라졌다.

아무 알림도 울리지 않았다.

나는 젖은 채로 서 있었다.


이제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카드도, 폰도, 택시도, 갈 곳도.

회사로 돌아가는 길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도시 밖을 향해.

비가 더 굵어졌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빗줄기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였다. 도로도, 건물도 다 흐릿했다. 젖은 머리에서 물이 흘러 눈으로 들어갔다.

나는 눈을 문지르면서,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번화가 한복판에 와 있었다. 사람들이 바쁘게 거리를 걸었고 나는 천천히 걷고 있었다.

건물 외벽에 스크린이 켜져 있었다.

빗속에서도 밝았다. 큰 건물에서 보이는 커다란 크기였다.


얼굴들이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이름과 함께.

나는 걸음을 멈췄다.

저 얼굴을, 나는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나만 휴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