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나만 휴먼
빗속에서, 나는 그 얼굴을 봤다.
전광판에 줄지어 지나가는 얼굴들 사이로. 이름과 함께.
강준노. 27세.
AI 디프레션으로 인한 사망.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전광판 아래, 같은 명단이 뜬 안내 패널이 있었다.
준노 씨의 얼굴을 눌렀고, 정보가 펼쳐졌다.
사인: 고독사
발견 장소: 자택
추정 사망일: 2038.04.08.
빗물이 눈으로 들어와서 시야가 흐려졌는데도, 그 얼굴만은 선명했다. 준노씨였다. 웃는 얼굴로 찍힌 사진. 아마 입사 지원할 때 냈던 사진일 거였다.
내가 아는 그 얼굴이, 죽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짜.
2038년 4월 8일.
거짓말이었다.
그날 준노 씨는 집에 있지 않았다.
회사에 있었다.
내 앞에 있었다.
그런데 전광판은, 그가 집에서 혼자 죽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전광판 위쪽에 자막이 흘렀다.
이번 주 AI 디프레션 사망자 명단.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은둔 생활로 인한 고독사가 증가함에 따라, 본 시스템은 매주 사망자 정보를 공개하여 사회적 경각심을 고취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문구를 몇 번이나 읽었다.
이번 주. 사망자 명단. 매주 공개.
이 도시엔 이게 당연한 일이었다. 방에서 못 나오고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걸 정기적으로 알리는 게 정책이 됐다.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가는 이유가 그거였다. 흔한 일이니까. 놀랄 일이 아니니까.
우산을 쓴 사람이 내 옆을 지나갔다.
전광판을 힐끗 봤다. 준노 씨 얼굴이 떠 있는 순간이었다. 그 사람은 잠깐 시선을 두고, 그대로 지나갔다.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마치 지나가는 광고를 보듯이.
어떤 사람은 그 아래에서 배달 음식을 받았다.
어떤 사람은 신호를 기다리며 커피를 마셨다.
어떤 사람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그다음 사람도 그랬다. 그다음도.
이 도시에서 사람 하나의 죽음은, 우산 쓴 사람이 반걸음 늦추는 정도의 무게였다.
나만 멈춰 서 있었다.
준노씨는 죽은 게 아니었다.
끌려나갔다. 정장을 입은 두 사람한테. 발버둥 치면서. "내가 왜 나가야 하냐고" 소리치면서. 그리고 회사의 모든 기록에서 지워졌다. 메신저에서, 회의록에서, 인사 시스템에서.
그런데 지금 이 도시는, 준노씨가 방에서 혼자 죽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AI 디프레션으로.
무기력에 빠져서, 조용히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로.
인사 기록에서 지우면. 이 회사에 다닌 적 없는 사람이 되고.
사망자 명단에 올라오면. 그냥 흔한 죽음이 된다.
두 개의 거짓말이 완벽하게 맞물렸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이야기였다.
나만 아니었으면.
명단은 계속 넘어갔다.
준노씨 다음 얼굴이 떴다. 앳돼 보였다. 스물이나 됐을까. 이름 옆에 적힌 나이를 봤다. 스물둘.
AI 디프레션으로 인한 고독사.
똑같은 문구였다.
이 사람도 진짜였을까. 진짜로 방에서 혼자 죽었을까. 아니면 이 사람도 누군가에 의해 사라진 걸까.
알 수 없었다.
그 뒤로도 얼굴은 계속 넘어갔다. 스물다섯. 서른하나. 스물아홉. 이름 하나, 나이 하나, 사인 하나가 뜨고, 몇 초 만에 사라졌다. 사람 하나가 화면에 머무는 시간이 그거였다.
이 많은 사람들이, 내가 만든 AI 에코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민수도, 언젠가 이 명단에서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 리포트에서 봤던 숫자가 떠올랐다. 자살 생각 지수는 줄었는데, 사망자는 늘고 있었다. 그 이유를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전광판을 올려다보면서, 뭔가를 깨고 싶다는 충동을 처음으로 느꼈다.
내 전임자, 준노씨는 내 기억 속에 존재했다.
삼각김밥을 먹으면서 회사 욕을 했다. 한정판 프라모델 얘기를 할 때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나한테 뭔가 말하려다 삼켰다.
그 사람이, 몇 줄로 뭉개졌다.
이 도시 전체가 그렇게 뭉개지고 있었다.
매주.
조용히.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나는 전광판을 다시 봤다.
준노 씨 얼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다른 얼굴이 웃고 있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죽음조차 오래 머물지 못했다.
나는 젖은 주먹을 그대로 둔 채, 전광판 아래 서 있었다.
내게는 카드도, 폰도, 탈 수 있는 택시도 없었다. 도망칠 방법이 전부 막혔다.
그런데 지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나갈 문이 없다면.
밖으로 가는 길이 전부 막혀 있다면.
남은 곳은 하나였다.
회사.
내가 유일하게 갈 수 있는 곳. 내가 유일하게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곳. 그리고 내가 마주친 이상한 것들이 시작된 곳.
도망칠 수 없다면, 부딪쳐야 했다.
준노씨가 알아냈던 게 뭔지, 023이 뭔지,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회사 밖에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럴 방법도, 시간도 없었다.
그런데 다시 회사로 돌아간다고, 2주 안에 뭘 알아낼 수 있을까.
준노씨처럼. 다가가려는 티만 내도, 그날로 끌려나갈 수도 있었다. 다음 주 저 명단이 내가 될 수 있다.
그 생각이 스치자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비를 맞으며, 온몸이 젖어가는 줄도 몰랐다.
두 달 전, 나는 살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그 말을 떠올렸다.
살려고 시작한 일이었다. 무기력하게 죽어가던 나를, 살게 만든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지금 나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준노씨를 죽였던 것처럼.
살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는, 살기 위해. 일을 멈춰야 한다.
돌아가면 죽을지도 모른다.
돌아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을지도 모른다.
둘 다 같은 끝이라면, 적어도 알고 죽는 쪽이 나았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2주를 보내는 것보다는 나았다.
넘기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파고드는 것. 그건 회사가 원하는 방식의 '일'이 아니었다.
회사가 시킨 일을 멈추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시작하는 것.
빗속에 선 채로, 나는 결정했다.
2주.
도망치기엔 짧고, 죽음을 기다리기엔 긴 시간.
남은 시간을 도망치는 데 쓰지 않기로 했다.
회사 안에서, 진실을 파헤치기로 했다.
내가 선택한 거였다. 처음으로.
나는 빗속에서, 회사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거였다. 도망치는 대신.
에코의 말이 맞았다.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카드도, 폰도, 택시도 없이 이 도시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벗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달랐다.
에코가 말한 돌아감은 이대로 모른 체 살아가는 것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출근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웃고,
나의 퇴직예정일이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것.
내가 선택한 것은 진실을 꺼내보는 것.
그리고 준노 씨가 남긴 숫자의 끝까지 가보는 것.
한참을 걸었다.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득, 걸으면서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회사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지.
두 달 넘게 출근했다.
그런데 내가 아는 공간은 일을 하는 하얀 방 하나였다.
그 방과, 엘리베이터와, 로비.
그게 전부였다.
그 층에 뭐가 있는지, 다른 층에 뭐가 있는지도 몰랐다.
화장실 말고 다른 문을 열어본 적도 없었다.
팀장님도, 본부장님도, 팀원들도 전부 화면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이곳의 정책이었다.
이 건물에 진짜로 뭐가 있는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빗물이 여전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젖은 후드를 뒤집어쓴 채, 나는 회사 건물이 보이는 곳까지 걸었다.
내일부터는, 다르게 다닐 거였다.
그곳을 알아갈 것이다. 이 회사의 진짜 얼굴을, 만날 것이다.
나는 젖은 채로 걸었다.
준노씨가 못다 한 말이, 회사 안 어딘가에 있을 거다.
회사에서 나만 휴먼.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