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밖은 춥다." 강산이 여러 번 바뀌는 직장 생활 동안 이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희망퇴직 소문이 돌 때, 동료가 회사를 나갈 때, 스타트업 간다는 후배를 말릴 때 — 어김없이 등장하는 그 문장. 어느 순간부터 나도 아무 의심 없이 복붙하고 있었다. 근데 이 말, 한 번도 제대로 검증한 적 없지 않나?

먼저 팩트부터 뒤집어보자. AI 도입 이후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얼굴 — 50대 김 부장님 — 이 아니었다. 한국은행 데이터를 보면, 지난 3년간 줄어든 청년 일자리가 21만 개인데 그중 20.8만 개가 AI 고노출 업종이다. 반면 같은 기간 50대 일자리는 오히려 20.9만 개 늘었고, 늘어난 일자리의 절반 이상이 역시 AI 고노출 업종이었다. AI가 쓸어간 건 경험 없는 자리였지, 30년 내공이 쌓인 자리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일견 반전인 얘기로 들릴 수 있다. 30년이 쌓아온 것들 — 말 안 해도 아는 이해관계자 관계, 상황 읽는 감각, 회의실 공기만으로 결론을 예측하는 능력 — 경제학자들은 이걸 암묵지(暗默知)라고 부른다. AI가 학습할 수 있는 건 텍스트로 명시된 것들뿐이다. 30년 경력의 진짜 자산은 텍스트로 표현 안 되는 것들이 훨씬 많다. 여기까지 들으면 "그럼 우리 X세대 살아남는 거야?" 싶겠지만.

플로피 디스크에 아무리 좋은 내용이 있어도 클라우드에 옮겨야 쓸모가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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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조직은 김 부장님한테 AI를 안 가르쳐줄까?

못 가르쳐주는 게 아니다. 안 가르쳐주는 거다. 이유가 있다. 리더급 인재에게 새 스킬을 가르치려면 시간도, 돈도, 에너지도 든다. 그리고 그 투자를 회수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근데 지금 비즈니스 환경이 요구하는 변화의 속도는 그 회수 기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기업 입장에서는 인간에게 투자하고 기다리는 것 자체가 이미 리스크가 된 거다. 일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예전엔 도제식으로 키우고, 집단 브레인스토밍으로 아이디어를 냈다. 지금은? 누가 빨리 문제를 발견하고, 어떤 툴이든 써서 솔루션을 가장 빨리 실행하느냐의 속도전이다. 그 툴이 요즘은 AI인 거고, 분야를 막론하고. 예전처럼 내 라인 착실히 키워서 조직 내 파워를 장악하고, 그동안 주주들을 "잘 되고 있습니다"로 안심시키는 눈 가리고 아웅 식 경영 — 더 이상 안 통한다. 시장이 그걸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기업의 선택은 단순해진다. 주니어는 AI로 대체하고, 시니어는 — 냉정하게 말하면 — 써먹을 때까지만 쓴다.

이런 이미지가 구린 이미지가 될 날이 머지 않았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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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지금 조직의 시니어들은 조선시대 마지막 제조상궁인 셈이다. 수십 년을 궁에서 갈고닦은 기술, 대단한 노하우, 후대에 전수해야 할 장인의 손맛. 근데 왕조가 끝나가는 시점엔 그 기술을 받아 이어갈 시스템 자체가 없어진다. 상궁의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기술이 필요한 세계가 끝나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석학들이 예견하는 미래는 AI와 극소수의 자본가, 헤게모니를 쥔 사람들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기업들이다. 그 구도가 완성되고 나면, 지금의 김 부장님 자리는 — 솔직히 — 어디에도 없다. 조직이 AI를 안 가르쳐주는 이유의 끝에는 이 그림이 있다. 뭔가 씁쓸하다. 근데 이게 현실이니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위세 등등 상궁마마님들도 역사의 뒤안길이 되실 줄 그 땐 모르셨겠지
위세 등등 상궁마마님들도 역사의 뒤안길이 되실 줄 그 땐 모르셨겠지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진짜 질문은 이거다. 조직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가 아니라 — 나는 지금 혼자 설 수 있는 사람인가? 조직이 사라져도, 팀이 해체돼도, 내일 당장 명함이 바뀌어도 — 내 것들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가. 조직이 주는 안전은 빌린 우산이다. 비가 그치면 도로 가져간다. 내 우산은 내가 챙겨야 한다. 30년 경력의 암묵지는 분명 강점이다. 근데 그게 힘을 발휘하려면 조건이 하나 있다. 그 암묵지를 디지털 언어로, 새로운 툴로, 낯선 포맷으로 재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안 되면 암묵지는 박물관 유물이 된다. OS 업데이트를 안 하면 앱이 하나씩 작동을 멈추는 것처럼.

조직 밖이 춥다고? 준비된 사람한테 조직 밖은 그냥 환경이다. 끈을 제대로 동여매고 달리는 트랙이다. 반대로, 준비 안 된 사람한테는 조직 안도 결국 춥다. 희망퇴직 통보를 회의실에서 받는 그 순간이 바로 그 증거다. 조직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금이 어쩌면 마지막 기회다. 월급이라는 활주로가 있을 때, 조직의 네트워크와 자원을 쓸 수 있을 때 — 혼자 서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나가고 나서 해야지"가 아니라"나가기 전에 해야"한다.

김 부장님, 조직이 가르쳐줄 때까지 기다리면 늦어요. 그 차례, 원래부터 없었을 수도 있거든요. 이상 오늘의 초큼 꼰대 생각 끝.

데이터 출처
AI 세대별 업무 활용률 (청년층 67.5% vs 장년층 35.6%): 한국은행, 「BOK 이슈노트: AI의 빠른 확산과 생산성 효과」, 2025.08

AI 확산으로 줄어든 청년 일자리 vs 늘어난 중장년 일자리: 한국은행, 「BOK 이슈노트: AI 확산과 청년고용 위축」, 202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