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낭에서 한 달 살이 시작 후 예상 못 한 부작용이 생겼어요.
"글감이… 안 떠올라."
이 도시, 참 묘합니다. 싱가포르처럼 깔끔한데 물가는 동남아예요. 다들 '페낭 좋아'라고 할 때 경관이나 음식 얘기인 줄 알았는데, 진짜 이유는 사람이더라고요.
🙂 표정 변화가 크지 않고, 하나같이 무-던-합니다. 그게 제 마음을 너무 편하게 만들어요.
찾아보니 오랜 다민족 공존의 역사 때문이라고 합니다. 말레이계·중국계·인도계가 수백 년간 한 섬에 살면서 '다른 게 당연하다'는 감각이 몸에 밴 거죠. 웬만한 다름은 그냥 넘어가는 태도가 기본입니다. 흥미로운 건, 인텔·AMD 등 4천 곳 넘는 반도체 기업이 모인 '동양의 실리콘밸리'라는 점. 사람도, 경제 토대도 안정적인 동네였어요.
그런데 그 쾌적함과 무던함 속에서 제 글감이 말라버렸습니다.
그제야 깨달았어요. 제 글의 동력이 사실은…
. 카페에서 주식·부동산 얘기를 큰 소리로 하는 사람들
. 0.1초라도 빨리 가려고 종종걸음 치는 지하철의 사람들
. 주문이 조금만 늦어도 표정이 바뀌는 사람들
이런 바쁜 사람들 속에서 '뒤처질지 모른다'는 무의식의 채찍이었다는 걸요. '내 글은 그동안 불안과 조급함에서 나온 거였나?' 질문의 답, 남은 한 달 동안 천천히 찾아보려 합니다.
🏫 왜 페낭에 오게 됐냐면요?
깔끔함·물가·인프라·커리큘럼 같은 기준을 세워 아이가 한 달간 다닐 학교 한 곳을 엄선했어요. 그리고 거절에 대한 두려움 없이 메일을 보냈죠.
"저는 마케터인데, 학교 마케팅을 도와드리는 대신 한 달간 우리 아이가 공부할 수 있을까요?"
조율 끝에 그저께부터 아이가 잘 다니고 있습니다 😊 와보니 정말 좋은 선택이었어요. 커리큘럼, 학비, 학생 수, 영어 보충 과정, 다양한 액티비티, 동네 인프라와 물가까지... (학교는 Straits International School Penang이에요. 아이와 한 달 살이 관심 있으신 분은 편하게 DM 주세요 🤣)
📌 페낭 사람들은, 전형적인 '안정형'이더라고요.
요즘 부쩍 '안정형'이라는 말이 들리죠. 성인 애착 유형 중 하나인데, 안정형은 이런 사람입니다.
. 자신과 타인을 모두 긍정적으로 봐서, 친밀함도 편하고 혼자 있는 것도 불안하지 않은 사람.
. 서운한 일이 있어도 억누르거나 폭발시키지 않고 차분히 말하는 사람.
. 연락이 좀 늦어도 "나 싫어하나?" 의심하지 않는, 자기 가치감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
회사 생활을 해보니, 이 안정형 분들이 더 롱런하고 더 승진하더라고요. 실적보다 더 중요해 보일 때도 있었어요. 이유는 셋이었습니다. 적을 안 만들고, 누구든 의지할 수 있고, "무엇보다 본인이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 그런데 왜 하필 '안정형'이 AI 시대 인재일까요?
생각해보세요.
. AI 챗봇과 대화하다 막히면 → 결국 사람 상담원과 연결됩니다.
. AI가 아무리 좋은 결과물을 내도, 상사·클라이언트가 방향을 못 잡고 변덕을 부리면 → 결국 사람이 나타나 조율합니다.
슬프게도 앞으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더 감정 노동이 될 가능성이 높아요. 변덕에 같이 흔들리지 않고 "이건 제가 풀어볼게요"라고 말하는 담담함.
그게 왜 핵심 역량이냐면
❶ AI는 '쉬운 일'을 가져가고 '어려운 감정'을 남깁니다. 정형화된 일은 AI가 가져가니, 사람에겐 불확실하고 감정적이고 정답 없는 일만 남아요. 그 일을 무너지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 게 안정형입니다.
❷ 똑똑함이 평준화되면, 차별점은 '신뢰'로 옮겨갑니다. 결과물은 누구나 AI로 빠르게 뽑는 시대. 그러면 기준은 '무엇을 만드느냐'가 아니라 '이 사람과 일하면 마음이 놓이느냐'가 됩니다. 신뢰는 화려함이 아니라 일관성에서 오고, 그 일관성이 안정형의 본질이에요.
❸ 안정감은 전염됩니다. 불안도 그렇고요. AI 시대 조직은 늘 불안합니다. 한 명이 흔들리면 팀이 출렁이지만, 한 명이 단단하면 그 사람을 중심으로 팀이 진정돼요. 안정형은 자기 감정만 다스리는 게 아니라 방 전체의 온도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 그럼 어떻게 안정형이 될 수 있을까요?
타고나는 게 아니라 '흔들려도 받아주는 경험'이 쌓일 때 만들어진다고 해요. 어릴 때 일관되게 반응받고 돌아갈 품이 있던 아이는 '나는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감각을 몸에 새깁니다.
문제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 자란 건 아니라는 거죠. 특히 한국은 성적으로, 등수로, 끊임없는 비교로 '증명해야 사랑받는다'고 배우기 쉬운 사회잖아요. 무던하게 있으면 뒤처진다는 불안이 기본값인 환경에서, 담담함을 갖기란 솔직히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희망적인 사실 하나. 안정형은 어른이 되어서도 후천적으로 얻을 수 있대요('획득된 안정 애착'이라고 부른다네요). 어릴 때 못 받은 일관된 반응을, 이제 내가 나에게 해주는 거예요.
. 실수했을 때 자책 대신 → "괜찮아, 다음에 하면 돼"라고 일관되게 반응해주기
. 나와 한 작은 약속을 지켜 → '나는 나를 믿어도 된다'는 증거 쌓기
. 흔들려도 곁에 남아주는 안전한 관계 만들기
증명하지 않아도 받아들여진다는 경험이 반복되면, 그제야 무던한 중심이 생깁니다.
📌 아이를 이렇게 키워야겠다 싶었습니다.
내가 어른이 되어 힘들게 다시 쌓는 그 감각을, 아이에겐 처음부터 줄 수 있다면 - 그게 부모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자산이겠더라고요.
. 성취로 사랑을 증명하게 하지 않기. '잘하면 사랑'이 아니라 '그냥 사랑'을 먼저
. 돌아올 품이 되어주기-넘어졌을 때 "왜 조심 안 했어"가 아니라, 일단 안길 곳이 되어주기.
. 완벽한 부모가 아니라 '회복하는' 부모 되기. 화냈다가도 다시 다가가 "아까 미안해" 하는 모습에서, 아이는 '관계는 깨져도 복구된다'를 배웁니다.
제가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건 좋은 스펙이 아니라, 페낭의 그 조용한 무던함, 흔들려도 돌아올 곳이 있다는 감각인 것 같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