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나만 휴먼

지난 이야기 - 살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비는 그쳐 있었다. 후드는 아직 축축했다.

개인 폰은 없었다. 어제 배수구에 던졌으니까.

대신 회사에서 지급한 업무폰이 주머니에 있었다.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버릴 수도 없었다. 이걸 버리면 회사와의 연결이 완전히 끊겨버릴 테니.

회사에 들어가면 매일 곧장 향하던 하얀 방.

하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복도에 서서, 처음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복도는 길었다.

하얀 벽이 끝없이 이어졌다. 문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있었는데, 대부분 번호도 표지판도 없었다. 두 달 넘게 이 복도를 지나다녔는데, 나는 이 문들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복도에서 다른 사람이 지나가는 것도, 저 문들 중 하나에서 누가 나오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늘 하얀 방으로 직행했다. 다른 곳은 볼 이유가 없었으니까.

나는 걷기 시작했다.

첫 번째 문을 밀었다. 잠겨 있었다.

두 번째 문도 잠겨 있었다.

세 번째 문이 열렸다.

안은 비어 있었다. 책상도 의자도 없이, 그냥 하얀 방이었다. 그런데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내 하얀방과 비슷해 보였다.

천장 모서리에, 작은 점이 하나 있었다. 먼지인지, 얼룩인지, 다른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앞에서 잠깐 서 있었다.

이 방은, 누군가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누군가가 나간 걸까.

네 번째 문도 열렸다.

여기도 비어 있었다. 그런데 방 한가운데,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딱 하나. 책상도 없이, 그냥 의자만.

의자 등받이 부분의 색이 조금 바래 있었다. 누군가 오래 앉아 있었던 자국처럼.
그런데 이 방이 누군가한테 배정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누가 여기 앉아서,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걸까.

나는 그 의자를 한참 보다가, 문을 닫았다.

다섯 번째 문은 밀자마자 스르르 닫혔다. 안을 보기도 전에.

내가 놓은 게 아니었다. 문에 힘을 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저절로 닫혔다.

닫히는 순간, 안쪽에서 작게 전자음이 울렸다.

딸깍.

잠금이 다시 걸리는 소리 같았다.

나는 그 문을 다시 밀지 않았다.

이 건물에 이런 방이 몇 개나 있을까.

사람이 쓰기 위해 만든 방이 아닌 것 같았다.

다른 이유로 존재하는 방들 같았다.

복도 끝에 섰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비상계단을 찾았다.

문에 붙은 표지판을 봤다.

비상계단. 처음이었다. 두 달 동안 나는 이 건물에서 엘리베이터 말고 다른 길로 움직여본 적이 없었다. 물론 엘리베이터엔 언제나 나 혼자였다.

비상계단 문을 밀었다.

공기가 달랐다.

위층은 늘 같은 온도였다. 냄새도 없었다. 그런데 계단실은 서늘했다. 콘크리트 냄새가 났다. 진짜 건물 냄새였다.

나는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갈수록, 위층에서 늘 들리던 소리가 사라졌다.

에어컨 소리.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던 낮은 진동. 하얀 방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여기 오니 그게 없다는 걸 알았다. 지금까지 그 소리가 계속 있었다는 것도, 지금 처음 깨달았다.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내 발소리만이 울렸다.

계단을 더 내려가자, 처음으로 하얗지 않은 복도가 나타났다.

조명도 어두웠다. 노란 불빛 몇 개가 간격을 두고 켜져 있었다. 벽은 회색이었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걸어 내려가는데, 소리가 들렸다.

나는 멈춰 섰다.

목소리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그런데 겹쳐서 들렸다. 같은 문장을 여러 사람이 조금씩 시차를 두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숨을 죽이고, 조금 더 다가갔다.

그러다, 아주 짧게 한 단어가 들렸다.

"괜찮아요."

곧바로 다른 목소리가 따라 했다.

"괜찮아요?"

억양이 아주 조금 달랐다. 처음 건 낮고 느렸다. 다음 건 살짝 높았다. 같은 말인데,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다음 목소리는 더 빨랐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다음도. 그다음도.

같은 말이, 계속 반복됐다.

조금씩 다른 속도로, 조금씩 다른 온도로.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괜찮아요."

은빈님도 그렇게 말했다. 에코도.

그리고, 희영님도.

나한테 그 말을 해준 모든 목소리가, 지금 이 문 너머에 섞여 있는 걸까.

같은 위로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진짜 위로를 해주는 말이 아니었다.

최적의 톤을 찾아가는 하나의 연습 같았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더 자연스럽게 들릴 때까지. 더 진짜처럼 들릴 때까지. 감정이 담긴 것과 건조한 것과 나지막이 꺼내는 것. 누군가. 아니, 무언가가 그 말을 반복해서 익히고 있었다.

두 달 넘게 이 회사를 다니면서, 나는 화면이 아닌 곳에서 진짜 목소리를 이렇게 들은 적이 없었다.

한 번도.

그런데 지금 듣고 있는 이것도, 진짜 목소리가 아니었다.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소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복도 끝에, 문이 하나 있었다.

다른 문들과 달랐다. 여기만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문 아래 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파란빛이었다.

나는 그 빛을 봤다. 낯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최근에, 여러 번 보았던 것 같은 파란빛.

나는 그 앞에 섰다.

손을 뻗었다.

손잡이가 차가웠다. 아니, 차가운 것 같았다.

손잡이를 쥐었다.

조금 더 가까이서 들으면, 이 목소리들이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나는 움찔했다.

업무폰이었다.

화면에 떴다.

[팀장]

나는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잠깐 그대로 있었다.

진동이 계속 울렸다.

지금은 업무 시간. 받지 않으면 이상해 보일 거였다.

나는 결국 전화를 받았다.

"네."

"인후 씨, 지금 어디세요? 회의 시작해야 하는데."

"…회의, 오후 아니었나요?"

"무슨 소리예요. 시간 바뀐 거 공지했었는데. 빨리 오세요."

전화가 끊겼다.

나는 폰을 봤다.

캘린더를 열었다.
회의 시간은 오전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상했다.

내 기억 속에는 분명 오후였다.

그런데 지금이 회의 시간이 되어 있었다.

내가 틀린 걸까.

아니면 뭔가 바뀐 걸까.

나는 문을 봤다. 들리던 소리가 어느새 멈춰 있었다. 내가 손을 뗀 것과 같은 순간이었는지, 아니면 전화가 오는 순간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회의를 안 가면, 이상하게 보일 거다. 평소와 다르게 조금 다급한 팀장의 말투. 지금은 이상하게 보이면 안 됐다. 준노씨처럼 되고 싶지 않으면.

뭔가 이상하게 너무 딱 맞는 타이밍이었다.

내가 이 문 앞에 서 있는 걸, 손잡이를 쥐고 있는 그 순간을. 누군가는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손을 뗐다.

물러서면서, 표지판 아래쪽을 봤다.

손잡이 주변만 유독 반질반질했다.

파란빛도 여전히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등지고,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반질반질한 손잡이가, 눈에 계속 밟혔다.

회사에서 나만 휴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