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 오늘의 자리

오늘도 출근한다.

내 자리를 찾아야 한다.

출입문을 들어서자 스크린에 문구가 뜬다.

지정 좌석: 3층. 103호.

방 번호는 나오는데, 위치는, 안 나온다.

원래는 위치까지 정확히 알려줬다.

3층에서 내린다.

103호는 어디지.

문이 열리자마자, 긴 복도가 보인다.

끝이 안 보이는 복도다.

양쪽 벽을 따라 같은 문이, 같은 간격으로, 몇백 개나 늘어서 있다.

그런데 숫자가 없다.

이걸 어떻게 찾지?

바로 옆 문을 연다.

안쪽을 보니 201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불을 켜 보니 방 안은 텅 비어 있다.

누가, 언제 이 번호를 붙인 걸까.

이 건물은 몇 번이나 증축됐다.

그때마다 번호를 다시 매겼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확실한 건, 아무도 모른다.

가까운 문부터, 하나씩 열어본다.

45호.

회의실이다.

테이블 위 스크린에, 문구가 떠 있다.

회의실 스크린에는 회의로그가 남겨져 있다.

09:00 — 회의 시작
09:03 — 안건 검토 완료
09:05 — 재검토 요청
09:07 — 승인 완료
09:08 — 회의 종료

의자는 하나도 당겨져 있지 않다.

반듯하게, 가지런히 있다.

103호가 아니다.

문을 닫고 옆으로 옮겨간다.

189호.

탕비실이다.

커피머신 전원은 켜져 있다.

받침대 위에, 컵 하나가 놓여 있다.

막 내려진 것처럼 보였는데, 손을 대보니 컵이 차갑다

103호가 아니다.

문을 닫는다.

다음 문을 연다.

넓은 창고다.

12호.

선반에 상자가 가득하고, 상자마다 같은 라벨이 붙어 있다.

미처리.

미처리.

미처리.

처리할 사람은, 없다.

103호가 아니다.

문을 닫고 다음 방으로 이어간다.

문을 열고, 닫는다.

다시 열고, 닫는다.

하나, 둘, 마흔아홉.

언제나처럼, 문을 열 때마다 센다.

이만큼 세어 본 건 오랜만이다.

다른 복도로 틀었다.

땀이 조금 났다.

지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만큼 걷고, 이만큼 문을 열었으니.

오늘은, 유난히 오래 걸렸다.

벽에 잠깐 기대어 숨을 고른다.

09:28

시간은 충분하다.

늦어도 오전 안에는 찾아야 한다.

아무리 늦어도 10시를 넘긴 적은 없었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되뇐다.

찾는 사람이 남는다.

찾는 사람은 남는다.

찾는 사람만 남는다.

언제부터 이 말을 되뇌었는지, 잘 모른다.

어느새 입에 배어 나오는 말이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그날까지만, 이렇게 찾으면 된다.

다시 걷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멈춘다.

문 하나를 연다.

어둠 속에 익숙한 무언가가 보인다.

문 뒤에 숫자가 보인다.

103

넓디넓은 텅 빈 방 안에 책상 하나, 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나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간다.

표시등이 켜진다.

지정 좌석 — 배정 완료.

198번째 방이었다.

10:34

의자에 앉는다.

숨을 크게 내쉰다.

찾았다.

서랍을 열어 노트북을 꺼내고 켠다.

근태 확인이 진행됩니다.
출근이 인정되었습니다.

인정되었습니다.

오늘도, 무사히.

봉지를 책상 위에 올린다.

땀을 흘렸다.

이제껏 가장 늦은 시간이었다.

배가 고프다. 이만큼 걸었으니 당연하다.

봉지를 열려고, 손을 뻗는다.

그러다, 멈춘다.

책상 아래쪽에, 얕은 흠집이 보였다.

0001

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주 작게.

이전에 분명히 없었던 자국이다.

자리가 지정되는 곳엔 늘 같은 책상이 놓인다.
크기와 높이, 서랍의 뻑뻑함까지 똑같다.

그러니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흠집은 어제까지 없었다.

시선을 옮긴다.

책상 바로 맞은편 바닥에, 움푹 파인 네모난 자국 4개가 남아 있다.

의자가 오래 놓여 있던 자리.

지금은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가, 속을 조여왔다.

방금까지 분명, 배가 고팠는데.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 손을 거뒀다.

봉지는 열지 않은 채로, 책상 위에 그대로 뒀다.

정면을 본다.

아무것도 없는 벽을.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누구였을까.

거기, 나 말고 누가 있었던 걸까.

생각해 봐도, 답이 없다.

누군가 이 자리 맞은편에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자리가 비어 있었다는 사실만은, 이상하게 또렷했다.

12시.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나는 봉지를 열었다.
김밥은 조금 식어 있었다.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먹어야 사니까.

오늘따라 입안에서 밥알이 오래 굴러다녔다.

6시

퇴근 문구가 뜬다.

퇴근 시간입니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노트북을 덮는다.

방을 나선다.

나오면서 문 앞의 숫자를 본다.

103호

호수를 예전엔 적어두기도 했다.

의미는 없었다.

다음 날이면, 번호도 위치도 바뀌어 있었다.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뒤를 한 번 돌아본다.

문이 저절로 닫힌다.

회사를 나오며, 늘 지나치던 쓰레기통 앞에 섰다.

빈 봉지를 버리려 했다.

그런데 봉지가, 이상하게 무거웠다.

열어본다.

김밥 한 줄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포장지도, 뜯기지 않은 채로.

한참 동안 봉지를 내려다봤다.

괜찮다.

조금만 더 지나면, 이 짓도 끝이다.

[회사에서 나만 휴먼 - 내자리]

다음 편. <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