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고려도 안한 고객을 사로잡는 '영업의 계단'

예전에 SBS 건물에서 일할 때, 녹즙을 구독할 생각이 1도 없었어요.
그런데 매일 오시는 녹즙 아주머니가 계셨습니다.

처음엔 그냥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셨어요.
어느 날은 책상 위 장식품을 보고 여행 다녀왔냐고 물으시고,
어느 날은 제 옷과 장신구를 칭찬해주셨죠.

그렇게 저를 어느 정도 알게 되셨을 때, 저한테 딱 필요한 맞춤 구독 음료를 추천해주셨습니다. 시음해보니 꽤 맛도 있더라고요.

🫨 정신 차려보니 저는 녹즙을 매달 구독하고 있었어요.
진정한 영업이었습니다.

돌아보면 그분은 저를 한 번도 '설득'한 적이 없어요.
대신 제 머릿속에 이런 문장을 한 계단씩 쌓으셨죠.

"인사는 받아드려야 할 것 같은데"
"대답은 해드려야 할 것 같은데"
"한 잔은 마셔봐야 할 것 같은데"
"하나쯤은 구독해야 할 것 같은데"

영업은 설득의 기술이 아니라, 고객 마음속에 '해줘야 할 것 같은데'를 한 계단씩 설계하는 일이더라고요.

B2B로 옮기면 이 계단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1. "답장은 해줘야 할 것 같은데" - 콜드메일인데 복붙이 아니에요. 저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살피고 만나고 싶은 이유를 짚어 언급했습니다. 이걸 무시하면 제가 무례한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듭니다.
  2. "통화는 해줘야 할 것 같은데" - 답장했더니 바로 팔지 않아요. 우리 회사에 당장 쓸 수 있는 자료를 먼저 보내줬습니다. 받은 게 있으니 15분 통화를 거절하기 어렵습니다.
  3. "미팅은 해야 할 것 같은데" - 15분 통화에서 우리 회사 상황, 페인포인트를 정확히 짚었어요. 경쟁사 사례까지 정리해 왔고요. 이만큼 준비한 사람인데 얼굴은 봐야 할 것만 같습니다.
  4. "제안서는 받아봐야 할 것 같은데" - 미팅에서 계약 얘기 대신 우리 문제를 진단하는 데 시간을 다 썼어요. 미팅만으로 이미 얻은 게 있으니, 제안서를 안 받는 게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5. "내부 공유는 해야 할 것 같은데" - 제안서가 우리 회사 언어로 쓰여 있어요. 상사를 설득할 한 장짜리 요약본까지 붙어 있습니다. 이걸 전달 안 하면 제가 일을 안 하는 셈이죠.
  6. "계약은... 해야 할 것 같은데" - 여기까지 오면 거절할 이유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미 받은 가치가 계약 도장보다 무겁게 느껴지거든요.

심리학에서는 이 계단을 '문간에 발 들여놓기(Foot-in-the-door)'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프리드먼과 프레이저의 실험에서, 작은 부탁에 먼저 응한 사람들은 나중에 훨씬 큰 부탁을 들어줄 확률이 4배 이상 높았다고 해요.

닐 라컴은 다수의 세일즈 콜을 분석한 책 <SPIN Selling>에서 큰 계약일수록 한 번에 클로징하려 하지 말고, 매 만남마다 '다음 한 걸음씩'만 확보하라고 말합니다.

고객은 꽤 능동적입니다. 매 단계에서 "이 정도는 해주는 게 맞지"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첫 만남에 6번 계단을 요구하면 바로 물러나요.

잘하는 영업은 언제나 '다음 한 계단'만 요구하고, 요구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줍니다.

녹즙 아주머니는 심리학 책을 읽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모든 이론을 누구보다 완벽하게 실행하고 계셨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