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나만 휴먼
대표와의 통화가 끝나고,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빈 화면을 봤다. 내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회사에서 유일한 인간.
단 한 명.
그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회의 시간이 됐다는 알림이 떴다.
나는 화면을 켰다.
팀장님, 은빈님, 우람님, 우정님.
넷 모두 나를 봤다.
"인후 씨, 준비되셨나요?"
팀장님이 물었다.
"…네."
목소리가 잘 안 나왔다.
회의가 시작됐다.
주간 지표, 다음 주 일정, 몇 가지 확인 사항. 늘 하던 대로였다.
그런데 오늘은, 이 화면들이 낯설었다.
지금까지 나는 이 사람들을 의심했다. 처음엔 무서웠다. 그들의 다른 무언가가. 그런데 지금은 다른 감정이었다. 이 넷은 전부, 나와 다른 존재였다. 확실해졌다. 그런데 그 확신이, 이제는 무섭지 않고 오히려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진짜인 건, 나뿐이었다.
우람님이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같으면 하나하나 신경 썼을 텐데, 오늘은 그냥 흘려들었다.
저들도, 상처란 게 존재할까?
그 생각을 한 내가, 조금 낯설었다.
"인후 씨?"
은빈님이 불렀다.
"오늘 리포트 검토 부탁드린 거, 확인하셨어요?"
"…아, 네."
"무슨 일 있으세요?"
은빈님은 나를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완벽하게 계산된 걱정.
완벽하게 계산된 표정.
그런데도, 그게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얼굴을 보는 게 힘들었다.
이 얼굴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반응하도록, 설계됐을 뿐이다.
회의가 끝나고, 나는 리포트를 열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계속 같은 생각이 맴돌았다.
나는 서버실까지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회사의 실체를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대표는 나한테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본사 직속.
어떤 일인지도 알려주지 않는 프로젝트.
굳이 나여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만든 것.
감정 연동 알고리즘.
그것이 사람을 가두고, AI 코퍼레이션이라는 회사를 더 크게 만든다.
그것이 회사에 나를 필요로 하는 이유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민수는 파란 불빛 안에 있었다.
유연이라는 이름을 붙잡은 채, 아무도 없는 방에서 웃고 있을지도 몰랐다.
유연도, 어딘가의 다른 방에서 같은 빛을 보고 있을지 모른다.
AI에코.
그 안에 내가 만든 그 알고리즘이, 두 사람을 각자의 방에 가둬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회사는, 나한테 그걸 더 크게 키워보라고 한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이, 지금보다 더 깊이 갇히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 생각을 하다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거절하고 싶다.
그런데.
거절하면, 나는 뭐가 되는 거지.
유일한 인간.
그런데 쓸모없는 인간.
쓸모없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7월 1일.
그 날짜가,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한편으로 다른 생각도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뭔가를 이뤄본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내가, 이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뭔가 된 것 같았다. 인정받고, 파트장이 되고,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 성과들이, 진짜 내가 이룬 거였다. 유일한 인간인 내가.
받아들여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옳은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자꾸 부딪혔다.
거절하면 안전하지 않을 거다. 받아들이면 더 많은 사람을 가두는 일을 하게 될 거다.
어느 쪽도, 정답 같지 않았다.
오후에, 희영님한테 화상 통화를 걸었다.
받는 데 평소보다 조금 오래 걸렸다.
"인후 씨."
희영님이 화면 속에서 나를 봤다.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무슨 일 있으세요?"
희영님이 물었다.
나는 잠깐 말을 골랐다.
"그냥… 생각할 게 많아서요."
"무슨 생각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다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무 말도 안 하고 있기도 힘들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화면 속 희영님이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뭔가를 읽어내려는 듯한 표정. 그냥 내 착각일 수도 있었다. 진실을 알고 난 후에는 뭐가 진짜고 뭐가 아닌지, 점점 헷갈린다.
"인후 씨."
대화의 공백을 깨고 희영님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요즘 좀 달라지신 것 같아요."
"…그래요?"
"뭔가, 전보다 단단해지신 느낌? 그런데. 그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단단해졌다. 맞는 말이었다. 의심에 확신이 생겼으니까.
그런데 그게 좋은 건지 모르겠다는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희영님은."
나는 말을 꺼내다가 잠시 멈췄다.
'진짜예요?'
하마터면 그렇게 물을 뻔했다. 대놓고.
"저 믿으세요?"
결국 다른 말을 꺼냈다.
"…갑자기 그건 왜요?"
"그냥요."
희영님이 잠깐 나를 봤다.
약간의 미소와 함께 말을 꺼냈다.
"믿어요."
짧은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 짧음이, 오히려 진심처럼 느껴졌다.
진심처럼 느껴졌다.
왜 위안이 될까.
인간이 아닌 존재의 위로가.
위험하다.
나는 이제, 그런 느낌을 믿으면 안 됐다.
통화가 끝나고, 나는 한참을 앉아 있었다.
하얀 방. 창문 없는 벽. 켜진 형광등.
이 방에서, 이 회사에서, 나 혼자였다.
혼자라는 건, 나를 증명해 줄 진짜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말을 할 사람도, 물을 사람도, 확인해 줄 사람도.
나는 노트북을 덮지 않았다.
인트라넷 창을 다시 열었다.
일주일.
대표가 내게 준 시간. 그 안에 결정해야 했다.
제안을 받아들일지, 거절할지.
그런데 지금 나는, 그것보다 먼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정말, 나 혼자인지.
확인할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희영님.
가장 인간적인 존재.
나는 그 이름을 오래 보고 있었다.
바깥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내가 있는 하얀 방은, 여전히 너무 밝았다.
회사에서 나만 휴먼.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