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순례길] 빌바오에서의 합법적 휴일

산티아고 순례길 13일 차, 빌바오 미술관 투어와 어마무시한 바를 만나다
202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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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13일 차
2018. 5. 26. 토요일
부르고스(Burgos) – 빌바오(Bilbao) – 부르고스(Burgos)

부르고스의 새벽

평소에는 그렇게 뜨기 싫은 눈이 오늘은 번뜩 떠지는, 오늘은 합법적으로 노는 날. 드디어 그렇게도 바라던 빌바오에 간다. 빌바오(Bilbao)는 스페인 북쪽에 있는 곳으로 예전에는 공업 도시로, 지금은 디자인 도시로 유명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구겐하임 미술관과 빌바오 미술관 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교 때부터 빌바오의 미술관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늘 기회가 없었다. 다른 유명한 미술관들은 그 나라의 수도나 여행지에 위치해 있어 방문할 수 있었지만 빌바오는 스페인 북쪽에 덩그러니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여행을 온다고 해도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에서 IN/OUT을 주로 하고, 여행지도 유명한 도시 근처 또는 남쪽에 몰려있다. 빌바오 딱 하나만 보고 먼 시간을 비행기로 이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스페인의 주요 여행 도시와 멀리 떨어진 빌바오

그런데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정말 가까웠다. 빌바오는 까미노 프랑스길*에서 들르는 도시, 로그로뇨와 부르고스에서도 육로로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고 까미노 북쪽길*에 속해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기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등산 스틱을 어떻게 잡는지도 모른 채 계획 없이 순례길에 발을 디뎠지만 딱 하나의 계획은 있었다. 순례길 중간에 어떻게든 구겐하임과 빌바오 미술관을 돌고 오겠다는 계획. 그래서 로그로뇨에서 빌바오를 들렀다 오려고 하루를 더 머물렀지만 미술관 정기휴일을 체크하지 못해 하루만 날리고 말았다. (이전화 참고) 하지만 오늘은 꼭 빌바오에 갈 거다. 가서 미술 작품을 모두 보고 올 거다.

*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가는 길은 여러 루트가 있고 길의 이름은 길의 특성을 따른다. 까미노 프랑스길은 순례길의 시작점이 프랑스 생장이라서, 까미노 북쪽길은 스페인 북쪽의 해안선을 따라 걷는 길이라서 이름 붙여졌다.

노란색 길이 프랑스 길, 하늘색 길이 북쪽 길 (출처 : follow the camino)
새벽에 출발하는 부르고스 출발 빌바오행 버스
보정 없는 진짜 찐_하늘

잔뜩 기대를 하고 길을 나섰지만 하늘도 무심하게, 빌바오에 도착하자부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미스트같은 비가 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빌바오는 확실히 북쪽에 위치한 곳이라 아주 추웠다. 사람들은 얇은 패딩이나 두꺼운 재킷을 입고 있었지만 나는 우산도 없이 얇디얇은 에어리즘 집업하나 걸치고 왔다. 얼굴에 질척이는 비바람에 덜덜 떨며 이 상태로 10분만 더 걸으면 무조건 감기몸살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구겐하임 미술관 앞에 딱 한 곳만 불이 켜져 있었다. ‘와’ 소리가 육성으로 나왔다.

심지어 발견한 카페는 아주 따뜻했고, 식빵으로 만든 샌드위치와 미니 버거를 팔고 있었다. 이걸 발견했을 때의 감동이란. 까미노 프랑스길에 있는 바르(bar)에는 거의 보카디요(Bocadillo, 바게트 안에 계란 등을 넣어 만든 스페인식 샌드위치)와 또르띠야(Tortilla, 감자나 시금치 등이 들어간 오믈렛)가 전부다. 처음에는 맛있게 먹었지만 점점 바게트 빵과 계란 오믈렛에 질려가고 있던 있었다. 이제는 좀 입천장이 까지는 딱딱한 바게트 말고 말랑말랑한 식빵 같은 빵으로 만든 무언가가 먹고 싶었다. 계란만 들어있는 샌드위치 말고 다채롭고 자극적인 속재료도 그리웠다. 그런데 이렇게 아침으로 마주하다니. 비록 비는 오지만 오랜만의 호사에 입이 즐거웠다.

오랜만에 마주한 말랑말랑한 빵과 샌드위치

구겐하임 미술관은 생각보다 더 위용이 있는 곳이었는데,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니 그 진가를 훨씬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창이 유리로 되어 있어 미술관 밖 풍경이 훤히 들여다 보였고 구조적인 디자인으로 채워져 있었다.

얇고 높은 LED 기둥에서 글자와 숫자가 떨어지는 제니 홀처의 <빌바오를 위한 설치 작품>도 보고, 수많은 작은 모니터에 입만 떠있는 작품도 보았다. 천장으로부터 매달려 있는 입들을 보고 무엇일까 싶어 다가갔더니 앞에 사람이 있을 때, 이를 감지해 웃음소리가 들리는 작품이었다. 모니터 앞에서 몸을 피하면 금방 웃는 소리는 멈췄다. 여러 모니터를 빠르게 지나치면 다양한 인종, 다양한 성별의 사람들의 입이 함께 웃었다. 1층을 가득 채우고 있는 리처드 세라의 <The matter of time>의 설치 작품도 인상적이었다. 크기는 물론이고 시각에 따라 작품의 모습이 달라져 자꾸 그 주위를 맴돌고 싶어 명상 공간 같은 그곳을 오래 걸었다.

(왼쪽) 제니 홀처 <빌바오를 위한 설치작품> (오른쪽) 리처드 세라 <The matter of time>

작품들을 모두 보고 나오니 2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원래라면 이 정도 걸으면 발과 다리가 아플 텐데 순례길을 걸은 덕인지 다리가 쌩쌩했다. 그렇게 튼튼한 다리로 빌바오 미술관까지 모두 도는데 거의 다섯 시간 정도 걸렸다. 빌바오를 오기 위해서 짧은 여행 일정임에도 무리해 하루를 할애하고, 심지어 미술관 휴관일을 체크하지 않아 하루를 버리고, 또다시 하루를 써 빌바오를 오는 험난한 일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수고를 할 가치가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작품들을 볼 수 있어서, 그렇게 오고 싶던 미술관에 올 수 있어서 미술관에서 걸어 다니는 순간순간이 행복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미술관을 딱 나섰는데, 완전히 갠 빌바오의 풍경이 펼쳐졌다. 빌바오 미술관 앞에는 나무가 무성한 공원이 있었는데 키가 큰 나무들이 한껏 물을 머금어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나뭇잎들이 스삭거렸다. 제각각의 초록색이었다. 이제 막 돋아난 여린 연두색의 잎부터, 채도 높은 초록을 자랑하는 나무가 어우러져 있었다.

우중충한 날씨로 회색 빛이 가득했던 빌바오의 모습이 단번에 선명해졌다. 극적으로 높아진 해상도가, 눈에 맺히는 수많은 색깔이 시리듯 아름다워서 한동안 서서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비가 말끔하게 닦아낸 거리를 느리게 걸으며 스페인의 봄 색감을 만끽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초록초록한 풍경

버스 시간까지는 한 시간 정도가 남아있었다. 좋은 작품들을 보고 난 마음을 얼큰한 술로 달래고 싶은 마음에 구글 맵을 뒤적여보니 근처에 평점이 좋은, 타파스로 미니 버거를 파는 바를 발견했다. 아까 먹었던 미니 버거와 맥주가 간절하던 차였는데 더할 나위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기에 있는 모두는 아는 사이인 듯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순간도 잠시, 모두가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어서 들어오라며, 여기에 앉으라며 한 명씩 말을 얹었다. 열댓 평 남짓한 바에서 나는, 가게 한가운데 앉아있는 유일한 이방인이었다.

이방인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어디 나라 사람인지, 이 가게를 어떻게 찾아온 건지, 스페인에 왜 온 건지, 공부하는 학생인지, 맥주를 마셔도 되는지 등을 열심히 물어봤다. 나는 한국인이며 산티아고를 걷고 있는 중이라고, 산티아고를 걸으려 스페인에 온 거라고, 대학교는 이미 졸업한 지 오래라고 말을 하자 다들 좋아했다. 빌바오에 온 걸 환영한다며 어떻게든 빌바오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스페인에 대해서 알려주려고 아우성이었다. 마음을 다해 환대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신기한 건, 직원 분과는 짧은 영어로 소통하고, 여기 앉은 주민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내게 스페인어를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든 말이 통했다. 까미노를 걷기 전 시원스쿨 스페인어 인강을 벼락치기했지만 그것도 10강에 그쳤고, 숙소 예약 정도만 간신히 할 수 있는 정도라서 말이 통할리 만무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음의 파동도 충분히 언어가 되는 모양이었다. 눈을 보며, 함께 웃으며 서로의 마음의 파동은 서로에게 닿았다.

맥주 두 잔을 연거푸 목에 흘려 넣고, 다시 진토닉을 시키자마자 직원이 내게 물었다.

‘너 술 좋아하니?’

‘나 완전 사랑해’

그 말을 하자마자 직원은 씩 웃더니 찬장 뒤에 있는 얼굴 크기 만한 잔을 꺼내 들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얼굴만 한 잔이었다. ‘설마 내 거?’라는 마음에 신이 났다. 저만큼이나 많이 술을 주겠다고?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걸 간신히 참고 이성을 잡으며, 이 잔에 진토닉을 주어도 괜찮겠냐는 직원의 질문에 평정심을 애써 찾으며 끄덕였다. 그제야 잔의 가로가 내 한 뼘 만한 잔에 직원이 진을 붓기 시작했다. 최고, 정말 최고였다.

취미로 조주 기능사를 따기도 했고 홍대의 칵테일 카페에서 일한 적도 있는 나는 쾌재를 부를 수밖에. 보통 진 토닉을 만들 때 진은 1.5oz(45ml)를 넣곤 하는데, 일하던 칵테일 카페에서도 진 45ml를 칼같이 계량해 넣었었다. 그런데 여기는 우선 계량이 없었다. 계량 용기인 지거*도 없고, 눈으로 하는 계량도 없었다. 커다란 잔에 푸어러**를 꽂은 진을 거꾸로 엎고는 원할 때 STOP을 외치라고 했다. 세상에 이런 낙원이 있나. 대충 눈대중으로 스탑을 외치고 들기도 무거운 잔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한 잔 마셔보니 여기가 바로 천국이자, 극락이자, 열반이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버스표가 못내 원망스러워졌다. 나 정말 돌아가기 싫은데?

*지거 : 칵테일용 계량 용기. 보통 1oz(30ml)와 1.5oz(45ml)를 계량할 수 있는 삼각형 모양의 작은 계량컵이 함께 붙어있는 경우가 많다.

**푸어러(립) : 술병 입구에 꽂아놓는 기구로, 술을 균일하게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잔이나 셰이커에 흘리지 않도록 해주는 기구.   

오늘도 술람찬 하루, 그리고 사실 여긴 #산티아고순례길

미니 버거 타파스와 맥주 큰 잔
맥주 큰 잔이 작아보이는 어마어마한 진토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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