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피더스는 라틴어로 빠르다를 뜻하는 Raidus에서 유래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는 영어 단어 Rapid(빠른)의 어원이기도 하다.
일본이 이 이름을 선택한 데에는 아주 절박하면서도 야심 찬 전략적 의미가 담겨 있다.
라피더스는 속도로 승부한다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서 가장 중요한 지표 중 하나가 TAT (Turn Around Time), 즉 주문을 받고 제품을 인도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TSMC나 삼성전자 같은 거대 기업들은 워낙 주문량이 많이 칩 하나를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라피더스는 소량이라도 AI 스타트업이 원하는 칩을 세상에서 가장 빨리 구워주겠다는 전략을 이름에 달고 있는 셈이다.
일본 반도체는 지난 30년간 멈춰 있었다. 그런데 지금 라피더스가 목표로 하는 공정은 2 나노이다.
현재의 40 나노 공정에서 갑자기 2 나노 공정으로 점프하겠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다.
광속으로 최첨단 기술에 도달하겠다는 것이 라피더스를 시작한 일본 정부와 기업들의 의지가 투영된 이름인 것이다.
그런데 뭐 이름만 짓는다고 해서 반도체 산업을 가지고 온다면 그동안 막대한 투자를 한 기업들이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이 들 것이다.
결국 라피더스 만으로는 현실적으로 도달하기 불가능한 목표이다.
이때에 일본 정부는 TSMC와 공생 관계를 가지고 협력을 이끌어 내기로 했다.
TSMC와 일본 정부가 이끄는 라피더스는 협력이 실질적으로 가능하다.
두 회사가 목표로 하는 시장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TSMC는 애플 엔비디아처럼 엄청난 양의 칩을 찍어내야 하는 기성복 대량 생산의 최강자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규모의 경제가 되지 않는 칩을 TSMC는 생산하지 않는다.
라피더스는 AI 스타트업이나 특정 기업이 소량으로 빠르게 필요로 하는 파운드리를 지향한다.
TSMC가 맡기엔 너무 양이 적고 까다로운 시제품이나 특수 칩 물량을 라피더스가 소화해 주는 식의 분업이 가능하다.
이런 협업의 결과로 TSMC는 일본 구마모토에 공장을 짓기로 했다.
일본 구마모토에 지은 공장은 JASM이라고 명명했고 일본의 막강한 소부장 업체들과의 협력을 이끌어내고 있다.
라피더스가 일본 기업들과 차세대 2 나노용 소재나 장비를 개발하면 그 결과물은 결국 TSMC도 사용하게 된다.
일본 정부는 라피더스와 TSMC를 모두 지원하며 일본 땅을 전 세계 반도체 제조의 허브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두 회사가 잘될수록 일본의 소부장 기업들도 강해지므로, 간접적인 기술 표준 공유나 공급망 협력이 활발히 일어나게 된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 대만과 일본은 외교적으로도 매우 친밀하다는 것이다.
반도체는 이제 경제를 넘어 안보의 영역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대만에만 집중된 제조 리스크를 일본으로 분산하는 과정에서 TSMC와 라피더스는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
실제로 일본 대학과 연구소에서 TSMC와 라피더스 양측을 위한 반도체 인재를 공동으로 양성하는 프로젝트가 다수 진행 중이다.
하지만 분명한 선은 있다.
TSMC는 자신들의 핵심 노하우 (초미세 공정의 수율 안정화 노하우)는 라피더스에게 전수하지는 않는다.
요약해 보면 현재로서는 라피더스 혼자서 첨단 공정에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
TSMC와 함께 협력하는 형태로 발전했고 일본의 소부장이 가세하면 일본이 40 나노에서 2 나노로 단기간에 빠른 속도로 점프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