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쓴 엉성한 초안을 다듬는 나는 작가일까 아니면 에디터일까? 글쓰기의 고통과 희열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인데 그 두 경험이 점점 희석되거나 무용한 '꼰대적 가치'로 치부되면 그 뒤에 남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고통과 희열을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더더욱 그것을 갈구할 일도 없다. 예술·창작 분야와 AI의 문제는 근본적인 가치와 의미의 문제를 시험대에 올리게 되어 괴로운 것이다.
- 글을 쓰면서 생각한 것들, 임경선 지음
데이터를 분석할 때 AI를 본격적으로 활용하면서 결과적으로 나를 포함한 분석가들은 AI가 나오기 이전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고 있다. 분석 보고서를 쓰는 과정은 대략 이렇다. 광고주나 기획팀과 미팅 혹은 이메일로 전달받은 요구사항을 정리해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수집한 데이터를 AI가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게 정제한다. 정제된 데이터는 고민에 고민을 거친 프롬프트를 만나 데이터 뭉치에서 글이나 테이블, 또는 그래프로 변신한다.
중요한 건 이때부터다. AI가 작성한 것처럼 보이면 안 되는 게 포인트다. 필요없는 접속사나 조사, 불필요한 영단어, 말도 안 되는 소위 ’AI 스러운 ‘ 문장들은 과감히 삭제하고 그 자리에 사람이 직접 쓰고 다듬은 문장을 채운다. 프롬프트를 토대로 분석된 테이블에 있는 숫자를 보고서로 전달할 수 있을지 하나씩 검증하고, 그 과정에서 수치가 맞지 않는 경우가 발견되면 프롬프트 초안을 다시 수정한다.
그렇게 초안이 완성되면 종이로 출력을 한다. 출력을 해서 빨간펜을 들고 직접 읽으면서 어색한 부분이나 맞춤법이 틀린 단어, 스토리상 불필요한 부분이 없는지 체크한다. 그런 뒤 보고서를 요청한 분께 초안을 전달하며 피드백을 요청한다. 만약 보완할 내용이 필요하면 추가해서 최종 보고서를 전달하는 게 우리 팀에서 분석 보고서를 작성하는 프로세스다.
팀 인원은 적은데 요청받는 보고서가 많다보니 실무에 뛰어들기도 하지만, 팀원들이 작성하는 보고서를 검토하고 피드백을 주는 일, 피드백을 받아 업데이트 된 보고서가 전달되기 전에 잘못된 부분이 없는지 체크하는 작업 또한 내가 할 일이다. 어쨌든 산출물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은 팀의 리더가 져야 하니까.
예전에 책을 쓰면서 데이터 분석은 요리와 같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수확하거나 구매해서 칼로 재료를 다듬고 냄비에 끓여서 접시에 플레이팅하는 과정은 한 편의 분석 보고서가 나오는 과정과 흡사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중간에 AI라는 동료이자 비서가 있다는 건데, AI와 함께 하지 않는 분석은 이제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분석가에게 AI는 필수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가장 빨리 대체될 직업 중 하나가 데이터 분석가인 경우도 종종 본다.
하지만 AI가 아무리 분석을 잘해도 그걸 지지고 볶아서 최종 산출물로 만들어내는 건 사람이다. 취미로 분석을 하는 게 아니라 돈을 받고 보고서라는 가치를 제공하는 입장에서 AI는 아직 보조하는 역할에 가깝지 메인 쉐프가 될 수 없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은퇴하고 목공이나 도배 같은 AI가 들어올 수 없는 일을 알아볼텐데 아직 몇 년 정도는 밥벌이가 가능할 것 같다.
임경선 작가의 에세이 ‘글을 쓰면서 생각한 것들’이라는 책을 선택한 이유는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분들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글을 쓰는지 궁금해서였다. 예전에 책을 쓰고 편집자와 미팅을 하거나 강연을 나가면 나를 ‘작가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었는데, 너무 부끄러워서 쥐구멍에 숨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한편으로 ‘작가’라는 기준이 딱히 없는 상태에서 내가 만드는 콘텐츠에 책임감을 갖고 당당하게 내가 썼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게 쓴 글이 사람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었다면 그게 ‘작가’ 아니면 무엇인가 라는 생각도 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