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2040년에 폐지한다고 합니다. 너무 늦은 이야기입니다. 그때면 세상이 다 바뀌어 있을 텐데요.”

얼마 전, 인스타그램 채널 ‘day1’이 자신의 계정에 올린 ‘수능 폐지’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읽고 한동안 멍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서울시교육청이 내놓은 ‘2040학년도 수능 폐지’ 제안을 두고 나온 촌철살인이었죠. 해당 글에서 day1은 수능의 본질을 아주 날카롭게 짚어냅니다. 그에 따르면 수능이 측정하는 것은 결국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답을 얼마나 빠르게 찾는가’일 뿐이며, 본질적으로는 파이가 고정된 세계에서 한정된 자산을 물려받을 사람을 효율적으로 고르기 위한 ‘선발 도구’이자 세대 승계 시스템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지적처럼 경제 성장률이 한 자릿수에 머물고 대기업 자리가 한정되어 있던 시절에는 그런 식의 줄 세우기가 꽤 합리적이었습니다. 하지만 AI가 등장하며 세상의 룰은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우리는 정해진 파이를 ‘나눠 먹고 승계하는’ 싸움에서, 파이 자체를 무한정 ‘확장하는’ 미지의 국면으로 튕겨져 나왔습니다. day1은 “한국도 경제 성장률을 몇 배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지만, 지금 교육은 여전히 나눠 먹는 사람을 고르는 시스템에 머물러 있다”며 이 지독한 시대적 엇박자를 꼬집었습니다.
이 통찰을 곱씹으며 저는 자연스레 지금의 2030 세대를 떠올렸습니다. 확장의 시대, 언뜻 들으면 한계가 사라진 벅찬 세상 같지만, 정작 이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하는 새로운 세대의 표정은 어딘가 묘하게 굳어 있습니다.
밀레니얼 세대가 남들에게 뒤처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포모(FOMO, 흐름에 뒤처지거나 좋은 기회를 나만 놓칠까 봐 두려워하는 소외 불안 심리)’를 앓았다면, 뒤이어 등장한 세대의 불안은 그 질감이 다릅니다. 불가능이 없어졌다는 것, 즉 개인에게 어떠한 물리적 한계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뒤집어 말해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이 오롯이 나에게 쏟아진다’는 가혹한 선고와 같습니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팽창하며 무한 경쟁과 확장을 요구하는데, 나를 평가하는 사회 시스템은 여전히 낡은 ‘줄 세우기’를 강요하는 가혹한 모순 속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20대 전문 연구 기관 대학내일20대연구소의 ‘캐릿(Careet)’이 분석한 121개의 트렌드 키워드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 거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요즘 세대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눈물겹고도 날카로운 생존법이 읽힙니다. 거대한 세상의 멱살을 잡는 대신 아주 작은 일상의 조각들을 꽉 움켜쥔, 우리 시대의 자화상입니다.

멱살을 잡을 수는 없잖아
거시 경제의 파도나 구조적인 사회 문제는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세상의 운전대를 쥐고 있다는 감각을 잃어버렸을 때, 사람들은 내 손안에 쥘 수 있는 아주 작고 미시적인 단위의 통제력에 병적으로 매달리게 됩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스스로의 심리 상태를 나노 단위로 쪼개어 관리하려는 태도입니다. 이들은 찬란해야 할 청춘을 제때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압박감을 ‘청춘통’이라 부르며, 자신의 ‘불안감도’를 극도로 높여 스스로를 진단합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통계에 따르면 2022년 우울증 진료 환자는 사상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어섰으며, 그중 20대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습니다. 과거 세대가 우울을 정신력의 문제로 치부했다면, 지금 세대는 이를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해야 할 만성 질환으로 대하며 방어막을 칩니다.
논리적인 노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남은 것은 ‘운’을 끌어당기는 것뿐입니다. 길가에서 네잎클로버를 찾고, 풍수지리 명당을 찾아다니며 행운을 긁어모으는 행동들이 유행합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완전 럭키비키잖아!”라고 외치는 초긍정의 밈은 언뜻 천진난만해 보이지만, 실상은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겹겹이 두르는 위안입니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식도 한없이 작아졌습니다. 거창한 일탈이나 시스템을 향한 분노 대신, 마음을 달래주는 매끄러운 돌맹이나 키캡 키링 처럼 피젯(초조함, 지루함, 흥분 등으로 인해 손으로 무언가를 꼼지락거리거나 만지작거리는)장난감들을 만지작거리며 안정을 찾습니다. 아무런 위협을 가하지 않을 것 같은 귀여운 굿즈나 인형에 지갑을 여는 ‘무해력’에 열광하고, 상사에게 화가 날 때는 회사 비품을 몰래 조금 더 쓰는 식의 귀여운 ‘엉뚱한 복수’로 소소한 통쾌함을 느낍니다. 거대한 세상은 통제할 수 없어도, 내 기분과 내 손끝의 감각만큼은 온전히 내가 통제하겠다는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흠 없는 세상에, 조금씩 멀미가 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은 이제 몇 초 만에 소름 돋도록 완벽한 그림을 그리고, 매끄러운 텍스트를 뽑아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기계의 매끄러운 연산으로 완성되는 이 ‘바이브 코딩’의 시대에,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흠결 없이 완벽한 ‘가짜’들에 깊은 멀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의 모든 글과 이미지가 AI가 만든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피로감, 즉 ‘죽은 인터넷 이론’에 깊이 공감하는 이들은 모니터 밖의 물리적인 감각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된 ‘로도깅(Raw-dogging)’ 챌린지도 이 피로감이 낳은 풍경일 겁니다. 장거리 비행 동안 책, 영화, 스마트폰 심지어 기내식조차 거부한 채 10시간 넘게 앞좌석의 모니터만 멍하니 응시하며 지루함을 버티는 이 행동은 젊은 층 사이에서 일종의 의지력 테스트로 번졌습니다. 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자극을 거부하고, 오롯이 자신의 육체와 정신만으로 시간을 견뎌내며 잃어버린 디지털 통제권을 되찾으려는 주체적인 선언인 셈입니다.
던질까 말까는 챌린지는 다시 부활 할까?
오프라인을 향한 갈망도 거세졌습니다. 입안에서 소리가 나는 캔디처럼 미각과 청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공감각 소비’를 즐기고, 효율성 따위는 던져버린 채 산책이나 필사 같은 아날로그적 취미에 몰두합니다. 결과물만 놓고 보면 인간은 절대 AI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에 감동할까요?

감정 소비는 가성비로, 생존은 땀방울로
낭만과 이상은 곳간에서 인심이 날 때 가능한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물가는 치솟고 고용은 얼어붙는 팍팍한 현실은, 과거의 화려했던 과시형 소비(플렉스, 욜로 등...)를 촌스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빈자리에는 살아남기 위한 지독한 효율과 실용주의가 자리 잡았습니다.
가성비와 실속을 중시하는 ‘안티 플렉스’ 기조 속에서 밥값과 시간을 아끼기 위해 간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스내킹(Snacking)’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놀이공원에서 줄을 서지 않기 위해 추가금을 내는 ‘패스트 패스’처럼, 이제 시간은 곧 가장 아까운 비용으로 환산됩니다. 이 차가운 계산법은 인간관계로도 번집니다. 감정을 소모해야 하는 깊은 관계를 거부하고, 목적에 맞게 짧고 가볍게 만났다가 흩어지는 ‘숏셜링(숏폼+소셜링)’이나 단시간에 여러 명과 대화하는 ‘로테이션 소개팅’이 각광받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디폴트로 삼거나 조용한 곳으로 홀로 떠나는 여행은 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치열한 하루를 버텨내느라 닳아버린 에너지를 지키기 위한 방어막입니다.
직업을 바라보는 시선도 철저히 생존형으로 바뀌었습니다. AI의 등장으로 한때 선망받던 화이트칼라 사무직의 위상이 흔들리자, 사람들은 고용 불안 속에 납작 엎드려 현재 직장에 버티기를 택합니다. 반면 흥미롭게도 시선은 가장 아날로그적인 곳으로 향합니다. 챗GPT가 코딩은 당장 대체할 수 있어도, 땀 흘려 배관을 고치고 도배를 하는 일은 기계가 쉽게 흉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입니다. 최근 청년들이 낡은 작업복을 입고 용접, 도배 등 블루칼라 직종으로 뛰어드는 현상은 남들의 시선보다 나의 확실한 생존을 택한 묵직한 움직임 입니다.
구분 | 2018년 | 2023년 | 증감 |
인원수 | 328,976명 | 349,265명 | 20,289명 증가 (+2만 명 이상) |
청년층(15~29세) 취업자 중 단순노무직 현황 (출처: 통계청)
기어코 '나'라는 장르를 개척해요
수능 만점, 명문대 진학, 대기업 취업. 과거 우리 사회를 지탱하던 이 매끄러운 컨베이어 벨트는 고장 난 지 오래입니다. 결과가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 불확실한 세계에서, 이들은 결과표 대신 ‘나만의 고유한 서사’라는 새로운 아이돌(우상)을 세우며 자존감을 지켜냅니다.
잘 포장된 완성품보다는, 비록 실패하더라도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과정 자체를 응원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빌드업 아이덴티티’가 그것입니다. 동시에 나 자신을 정밀하게 타기팅합니다. MBTI를 넘어 퍼스널 컬러, 체형 분석 등 수단을 가리지 않고 나를 분석하는 ‘셀프 분석 세대’는 자신이 도달하고 싶은 이상향을 ‘추구미’라는 단어로 명확히 설정합니다. 또한 일상의 물건 하나를 고를 때도 철저히 나의 미적 감각을 우선시하며 나만의 뾰족한 취향을 증명하려 애씁니다. 세상의 잣대가 희미해졌으니, 내 안의 잣대만큼은 나노 단위로 촘촘히 세워 정체성을 붙잡으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존이 우선인 척박한 사회는 씁쓸한 이면도 낳습니다. 파이가 요동치고 무한 경쟁이 일상화된 곳에서는 돈, 지위, 압도적인 기술(AI, AI, AI, AI...) 등 권력 자체가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받기 십상입니다. 거대한 시스템이나 승자 독식의 구조 앞에서 분노하기보다, 그 권력의 논리에 차라리 동화되는 것이 심리적으로 편안한 선택이 되어버린 까닭입니다.
이 불가능이 사라진 세상, 그러나 역설적으로 미치도록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건넬 수 있을까요?
“열심히 하면 언젠가 빛을 볼 거야”라는 낡고 거창한 위로는 더 이상 마음에 닿지 않습니다. 지금 이들에게 절실한 것은 막연한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만성적인 불안을 10분이라도 잠재워줄 수 있는 ‘내 손안의 작지만 확실한 통제감’, 그리고 매끈한 가짜들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 당신과 내가 투박하더라도 진짜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는 ‘과정의 투명한 공유’.
길을 걷다 마주친 평범한 사람에게 말을 건네고 5분간의 대화를 청하는 일처럼, 정답을 제시하려 들기보다는 그저 서툴게 걷고 있는 서로의 다리를 묵묵히 바라봐 주는 넉넉함. 어쩌면 그 조용한 지지야말로 이 척박한 세계에서 우리가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설득의 방식일지 모릅니다.
이번 주 유독 조금 더 긴 글 읽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 글이 계시는 자리에서 새로운 영감이 되었기를 바래요 :)
에디터 : 허성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