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소 잃고 외양간 여러 번 고치지 말아야 하는데

한국인들에겐 고유명사인 5월 18일.

영화 《서울의 봄》.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드라마 《오월의 청춘》.
영화 《택시운전사》.

굳이 여러 작품을 떠올리지 않아도,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날짜 5월 18일. 세대가 어떻든, 이 날이 어떤 날이라는 것을 한국 사람으로서 모를 수도, 몰라서도 안 되는 날.

그런데 스타벅스코리아는, 신세계는 왜 그런 프로모션을 했을까.

지금 여론은 난리다. 사장 해임을 두고 왜 꼬리 자르기로 그치냐. 회장의 이른 사과를 두고는 스타벅스 본사에 물어내야 할 콜옵션 때문이다, 광주에 들어간 그리고 들어갈 천문학적 투자 때문이다. 사장이 작은 온라인 프로모션 문구까지 신경 쓸 수도 없는데 사장 해임한다고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을 거냐. 모든 것은 회장인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책임을 진다는 거냐.

무엇으로도 변명이 될 수 없고, 쉽사리 수습될 것 같지도 않은 상황을 자초한 기업에 화도 나고 통탄을 금할 수 없지만.

마케터로서, 기업이, 특히 큰 브랜드를 가진 큰 조직이 평판과 리스크를 관리하는 데 어떤 의사결정 구조와 조직문화와 거버넌스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윗사람이 일일이 챙길 수 없다는 말, 그 자체로는 면죄부가 안 된다

내 생각은 꼰대의 짧은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소비자 터치 포인트가 무한대로 늘어나고, 마이크로 액티비티는 더 이상 숨길 수 없고, 디지털 채널은 24/7으로 돌아가는 이 상황에서, 관리자 한 명이 모든 걸 게이트키핑 한다는 건 이미 끝난 모델이다. CEO가 SNS 카피 한 줄을 직접 들여다보는 그림은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하다 한들 정상적인 조직도 아니다.

그렇다고 회장이나 사장이 일일이 챙길 수 없는데 어쩌란 거냐, 하며 억울해해서도 안 된다. 윗사람은 이런 일이 있을 때 책임지라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직접 카피를 검수 못 했다는 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윗사람이라는 자리는 책임지는 자리이다. 소 잃고 외양간 적게 고치려면, 평소에 손이 닿지 않는 영역도 기업의 가치와 철학으로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사고 다음 단계가 진짜 문제다 — 프로세스 악순환

그런데 인간이란, 늘 문제가 생겨야 해결책을 생각하게 마련인지라 이런 일이 생기고 나면 항상 나오는 건,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겠습니다"이다. 그런데 그 재발 방지를 어떻게 마련하느냐, 그건 사람마다, 조직마다 다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더 꼼꼼한 검토와, 리뷰에 리뷰, 그리고 담당자들의 손발을 묶는 프로세스일 것이다.

보고 무한 루프
보고 무한 루프

그럴수록 담당자들의 간은 더 쪼그라든다. 새로운 거, 기발한 거 해봐야 어떤 리스크에 걸릴지 모르니, 그냥 안전한 카드 — 예전에 했는데 윗사람들이 괜찮다고 했던 — 만 복붙 한다. 새롭지 않으니 시장 반응은 시큰둥하다. 매출이 안 나온다.

그러면 다시 윗선에 압력이 들어온다. 주주들로부터, 오너들로부터, 윗사람들보다 더 높은 천상계 사람들로부터.

그러면 또 탑다운으로 내려온다. (무슨 돌고 도는 물레방아다.)

"거, 좀 참신한 아이디어 없나. 신입사원들, 젠지들한테 아이디어 좀 가지고 오라고 해봐요."

이렇게 또 제2의 SNS 발화, 프로모션 발화가 생기지 말란 법이 없다. 사고 → 프로세스 추가 → 담당자 위축 → 안전 카드 복붙 → 매출 정체 → 위에서 압박 → 신입에게 참신함 강요 → 다시 사고. 어떤 브랜드가, 어떤 조직이 이 루프에 또 빠지지 말란 법은 없다. 한국에만 국한된 이야기도 아닐 테고.


프로세스가 아니라,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이럴 때 높으신 분들이 해야 하는 건, 촘촘한 그물로 더 옥죄는 리뷰에 리뷰에 리뷰를 더하는 프로세스가 아니다.

"시스템"을 만드는 거다.

실무진이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권한과, 동시에 그 시도의 파장과 리스크에 대한 책임도 함께 질 수 있는 시스템. 그리고 경영진과 임원진은, 실무진이 그런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트레이닝하고, 리스크를 사전에 검토해 볼 수 있는 단계적 안전장치를 만들어 두어야 한다.

권한 없이 책임만 묻는 건 — 시스템이 아니라 함정이고요.
책임 없이 권한만 주는 건 — 시스템이 아니라 무책임이다.

권한과 책임이 같은 사람의 자리에 함께 놓이는 것. 그 자리에 닿기 전 단계적으로 리스크를 가늠해 볼 안전장치가 깔리는 것. 이 두 가지가 같이 가야 비로소 시스템이라 부를 수 있다.


individual player 한 명 한 명이 self-screening 하는 그림

시스템을 좀 풀어서 말하면 이런 거다.

대행사에서 카피 시안을 가져왔다. SNS에 올릴 5월 셋째 주 프로모션 비주얼이다. 5월 18일이 포함된 그 주.

이 시안을 받은 담당자가 — 직급이 매니저든 시니어 매니저든 인턴이든 — "이 날짜에 이런 톤이 나가도 괜찮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을 던졌을 때, 질문이 사라지지 않고 단계적 안전장치를 따라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라인이 있어야 한다.

이게 시스템이다. 게이트키핑이 아니라 self-screening, 그리고 self-screening의 결과를 받아주는 단계적 라인.

CEO가 한 줄 한 줄 검수하는 그림이 아니라, 100명의 individual player 가 각자 자기 자리에서 "이거 리스크 있나?"를 묻고, 묻는 순간 그 질문이 회피되지 않고 적절한 단계에서 검토되는 — 그런 그림이어야 한다.


어쩌면, 산업혁명형 조직 자체가 수명을 다한 것

킹리적 갓심 (철 지난 유행어 죄송) — 이건 어쩌면 산업혁명 때부터 이어져 온 위계형 의사결정 구조, 그리고 80년대 도요타가 칸반으로 정점을 찍었다는 그 '팀' 단위 일하기 방식 자체가 수명을 다한 것 아닐까 싶다.

브랜드는 이제 한 사람의 책임자가 통제할 수 있는 사이즈를 한참 넘어섰다. 메가 브랜드일수록 더 그렇다. 매장 한 곳의 음료 이름, 인스타그램 한 컷의 캡션, 챗봇의 자동 응답 — 이 모든 것이 브랜드의 발언이다. 그리고 이 모든 발언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이 브랜드의 발언들과 액션들은 너무나 다양한 소비자들의 생활에 직결된다. 심지어 소셜 미디어의 파급력은 — 예전 같으면 한참 걸릴 파장이 한순간에 터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의사결정 구조도 그 모양을 따라가야 한다. 위에서 아래로 통제하는 모양이 아니라, 각 노드에서 판단하고, 판단의 결과가 네트워크로 공유되는 모양. 한 명 한 명이 자신의 업무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스스로 판단하고, 리스크가 있다면 적절한 라인을 따라 검토되는 그런 구조 말이다.

말은 쉽다. 실행은? 솔까 나도 그런 시스템을 본 적이 손에 꼽는다. 내가 만들려고 하면 더 어려웠다. 그러니까 더더욱, 지금부터라도 그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해 본다. 소심하지만 작은 목소리라도 내어본다.


그래서 묻고 싶다

이 글을 보고 계신 마케터분들께, 그리고 마케터를 옆에서 보는 분들께 묻고 싶은 게 있다.

지금 일하는 조직에서, 본인이 작업하는 카피·이미지·캠페인이 — 어떤 라인을 따라 검토되고, 어떤 라인을 따라 책임이 분배되는지, 한 번이라도 명문화해서 본 적 있으신가요?

없다면 그게 정상이지요. 대부분의 조직이 그렇답니다. 명문화된 시스템 없이 "센스 있는 사람이 알아서 거를 거다"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굴러간다.

그러다 사고가 나면 — 사장이 잘렸다, 회장이 사과했다, 끝. 그리고 그다음엔 — 촘촘한 프로세스 한 겹이 추가된다. 담당자 간은 또 쪼그라들고 다음 사고는 또 같은 모습으로 온다.


마케터 실무 체크리스트 4종

소 잃고 외양간을 또 고치는 자리에 서기 전에, 본인 일에서 한 번씩 점검해 봤으면 좋겠다.

1. 민감 날짜 캘린더가 시스템에 반영되어 있고 팀에 consensus 가 있는가.
5월 18일, 4월 16일, 10월 29일, 6월 25일. 우리 조직 마케팅 캘린더에 이런 날짜들이 별도 레이어로 표시돼 있는가. 자동화된 발행 시스템이 이 날짜를 인식하고 자동으로 한 단계 추가 검토를 호출하는가. 이게 단계적 안전장치의 가장 기본이다. (세월호, 이태원 사고 등 관련한 것들도 잊지 말아야 한다.)

2. 담당자가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갖고 있는가.
카피한 줄, 이미지 한 컷을 결정한 사람이, 그 결정의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결정은 위에서 내려오고 책임은 아래에서 지는 구조인가. 후자라면 그건 시스템이 아니라 함정이다.

3. self-screening의 목소리가 위로 올라가는가
담당자가 "이거 좀 이상한데요"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이 사라지지 않고 적절한 단계로 올라가는가. 올라가서 진지하게 검토되는가. 묵살당하지 않는다는 신뢰가 조직 안에 있는가. 신뢰가 없으면 self-screening 은 작동하지 않는걸요. 담당자는 입을 닫는다.

4. 사고 후에 만드는 게 프로세스인가, 시스템인가
사고가 났을 때 — 작은 사고든 큰 사고든 — 사람을 자르고 리뷰 단계를 한 겹 더 얹는 데서 그치는가. 아니면 권한과 책임이 같은 자리에 놓이도록 구조를 다시 짜는 회고가 돌아가는가. 전자는 다음 사고를 예약하는 일이다.

브랜드 관리는 더 이상 한 사람의 일이 아니다. 100명, 1000명의 individual player 가 자기 자리에서 판단하고, 그 판단이 단계적 안전장치를 따라 위로 전달되고, 시스템이 받아주는 — 그런 분산형 의사결정 구조가 메가 브랜드의 유일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말은 쉽다. 이런 조직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하루아침에는 어렵다. 그래도 이럴 때일수록 깊게 깨닫고 하나씩 빌드업해 나가다 보면 만들어질 것이다. 제대로 작동하는 브랜드 거버넌스 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