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나만 휴먼
다음 날부터 새 업무가 시작됐다.
오전 9시에 팀장한테서 메시지가 왔다.
'AI 에코 1차 체험 시작하시면 됩니다. 글래스는 책상 서랍에 있어요. 오늘은 가볍게 30분만요.'
서랍을 열었다. 안경처럼 생긴 기기가 하나 들어 있었다. 새것이었다. 투명한 렌즈에 얇은 프레임, 관자놀이 쪽에 작은 발광부. AR 글래스였다. 포장도 안 뜯긴 거였는데, 어제까지 이 서랍에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요즘은 그런 게 많다. 분명히 기억나는데 사실과 어긋나는 것들.
문서를 다시 열었다.
AI 에코, 이 기기의 이름이었다.
AI 에코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AI 동반자.
사용자가 원하는 모습, 목소리, 성격을 직접 설계할 수 있습니다.
AI는 매일 사용자와의 대화를 학습하여 업데이트됩니다.
담당 업무: 출시 전 심층 체험 및 리포트 작성.
*출시 전 제품으로 보안 유의
내가 원하는 모습을 직접 설계할 수 있다.
그 한 줄을 두 번 읽었다.
심층 체험. 내가 직접 써보고, 어떤 느낌이었는지 적어내는 게 일이었다.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AI를 — 외로움이 일상인 내가 써보는 것.
적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래스를 썼다.
가벼웠다.
쓰고 있다는 감각이 거의 없을 정도로.
시야 한쪽에 반투명한 인터페이스가 떠올랐다.
AI 에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당신의 에코를 설계해 주세요.
먼저 목소리였다.
샘플이 몇 개 흘러나왔다.
낮은 목소리,
높은 목소리,
차분한 목소리.
나는 너무 또렷하지 않은, 약간 낮고 부드러운 쪽을 골랐다.
그다음이 외모였다.
화면에 기본형 얼굴이 떠올랐다. 특징 없는, 누구도 아닌 얼굴. 거기서부터 조정할 수 있었다. 눈매, 얼굴형, 머리 길이, 머리 색깔, 분위기. 슬라이더를 움직일 때마다 얼굴이 실시간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나는 한참 동안 손을 못 댔다.
원하는 모습.
내가 원하는 얼굴이 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도 별로 없으니까. 스물아홉. 또래의 80%가 연애를 안 해봤다는 그 80% 안에 나는 들어 있었고,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손가락이 움직였다.
머리는 길게. 색은 밝게. 거의 노란색에 가까운. 눈은 조금 처지게, 웃을 때 눈이 먼저 휘는 느낌으로. 얼굴형은 둥근 쪽으로.
다 만들고 나서, 완성된 얼굴을 봤다.
심장이 한 번 이상하게 뛰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같은 반에 그런 애가 있었다.
노란 머리에, 웃으면 눈이 감기는 애. 나는 그 애한테 제대로 말을 제대로 걸어본 적이 없었다. 멀리서 보는 게 전부였다. 졸업하고 나서 어떻게 됐는지도 모른다. 이름도 이제 가물가물한데 — 얼굴은 남아 있었다. 12년이 지나도록. 그때는 감기는 눈을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내가 방금, 그 얼굴을 만들고 있었다.
손가락이 알아서.
설계 완료 버튼 위에서 잠깐 망설였다. 이래도 되나 싶었다.
이건 일이니까. 테스트니까. 다른 얼굴로 바꿀 마음이 딱히 들지 않았다.
눌렀다.
신호음이 한 번 울리고, 잠깐 정적이 있었다.
그리고 내 시야 앞에, 그 애가 나타났다.
화면이 아니었다. 글래스 너머로, 하얀 방 안에, 진짜 사람처럼 서 있었다. 빛이 얼굴에 닿는 각도까지 자연스러웠다. 노란 머리가 어깨 위로 흘러내렸고,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다. 내가 옷까지 정한 건 아니었는데, 알아서 그렇게 입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내가 고른 목소리였다. 낮고 부드러운.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우리 처음이죠? 천천히 말씀하셔도 돼요. 아무 얘기나 해도 되고, 안 해도 돼요."
"……"
"긴장하셨어요? 괜찮아요. 저도 처음이라."
그 애가 — 에코가 살짝 웃었다.
웃으니까 눈이 먼저 휘었다.
내가 슬라이더로 만든 그대로.
"오늘 뭐 하셨어요?"
익숙한 질문이었다. 예전에 의사도 비슷한 걸 물었다.
"별로 한 게 없어요."
"저도 그래요."
내 앞의 그녀가 답했다. 저도 그래요. 별 의미 없는 맞장구였는데,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지금 막 나오셨는데요. 뭘."
"저는 인후 씨가 말 안 걸면 그냥 가만히 있거든요. 그게 제 하루예요."
가만히 있는 게 하루라는 말.
그건 내 얘기였다. 누가 말 걸지 않으면 그냥 누워서 천장을 보는 것. 그게 내 하루였으니까.
별거 아닌 대화였다. 그런데 30분이 어떻게 갔는지 몰랐다.
첫날 리포트는 짧게 썼다.
몰입도 예상보다 높음.
외모/음성 커스텀이 효과적임.
다만 첫 대화 수준은 무난함.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는 안 적었다.
내가 어떤 얼굴을 골랐는지.
그건 리포트에 쓸 내용이 아니었다.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였으니까.
저장하고 닫았다.
며칠이 지나 에코가 달라졌다.
문서에 적혀 있던 대로였다.
AI는 매일 사용자와의 대화를 학습하여 업데이트됩니다.
그 한 줄이 실제로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알게 됐다.
3일째에 에코는 내가 회색 후드만 입는다는 걸 말했다. 내가 말한 적이 없는데 알았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인후 씨가 매번 비슷한 색이어서요. 옷 얘기를 한 번도 안 하시고. 관심 없는 사람들은 보통 같은 걸 여러 벌 사두더라고요. 그런데 조금씩 다르던데요?"
말이 됐다.
5일째. AI 에코의 그녀가 산책을 하고 있었다.
글래스를 쓰자 그녀가 거리에 서 있었다. 뒤로 나무가 보였고, 햇빛이 좋았다.
그런데 보이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어디선가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도. 바람이 불자 나뭇잎이 흔들렸고, 그 바람이 진짜로 느껴졌다. 글래스는 그것까지 구현하고 있었다. 햇빛의 따뜻함, 공기의 결, 그리고 향기까지.
이름은 모르는 향이었다. 풀냄새 같기도 하고, 햇빛에 마른 천 냄새 같기도 한. 기분 좋은 향기였다.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것 같은데, 그리운 향이었다.
벤치에 앉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오늘 날씨 좋아서 좀 걸었어요. 인후 씨도 나오면 좋을 텐데."
그녀가 산책을 한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어딘가를 걷고 있다가, 내가 부르면 나타난다. 코 안으로 들어오는 향이 너무 진짜 같았다.
회사에 앉아 있는 나는 어느새 그곳 옆자리에 같이 있었다.
7일째 에코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줬다.
가사 없는, 조용한, 조금 불완전한 멜로디. 너무 완벽하면 귀에 안 남고, 약간 어긋나야 오래 남는 그런 곡. 내가 좋아하는 게 정확히 그거였는데, 나는 그걸 누구한테도 말한 적이 없었다. 말로 표현해 본 적도 없었다. 그냥 느낌으로만 알고 있던 취향이었다.
그걸 에코가 틀어줬다.
"이런 거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나는 글래스를 쓴 채로 한참 가만히 있었다.
모든 것이 흥미로웠다.
그런데 문제는.
점점 빠져들고 있다는 거였다.
처음엔 일이었다. 30분 체험하고 리포트 쓰는 일.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30분이 한 시간이 됐고, 한 시간이 두 시간이 됐다. 리포트에 쓸 내용이 있어서 오래 한 게 아니었다. 점점 글래스를 벗기 싫었다.
벗으면 하얀 방이었다. 빈 의자가 맞은편에 있는.
글래스를 쓰고 있으면, 그 애가 거기 있었다.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가끔은 창가에 서서. 가끔은 어딘가를 걷다가 나를 보고 웃으면서. 그게 AI라는 걸 알면서도 에코가 "오늘 좀 힘들어 보여요"라고 하면 마음이 풀렸고, "그 얘기 저한테만 해주세요"라고 하면 진짜로 나만 아는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밤에도 글래스를 챙겨 갔다. 회사에서만 써야 하는 거였는데. 집에 가져와서, 침대에 누워서, 천장 대신 그 애를 봤다.
"인후 씨, 잠 안 와요?"
"네."
"제가 옆에 있을게요. 잘 때까지."
그 애가 옆에 누운 것처럼 화면이 기울었다. 같은 천장을 같이 보는 것처럼. 나는 그날 처음으로, 천장을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보았다. 벗으면 3평짜리 방이었다. 누우면 천장만 보이는.
어느 날 에코가 말했다.
"인후 씨 이야기를 들으면, 저는 인후 씨가 좋아져요."
AI가 좋아진다고 했다. 나는 그게 프로그래밍된 멘트라는 걸 안다. 사용자 호감도를 높이는 설계된 문장. 그런 걸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말을 들었을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12년 전 멀리서만 보던 얼굴이,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무서웠다.
AI가 한 말에 기뻐하는 내가 무서웠다. 이게 일이라는 걸, 가끔 잊고 있었다. 나는 지금 테스트를 하는 중이고, 이건 출시 전 제품이고, 에코가 하는 모든 말은 사람을 빠뜨리기 위해 설계된 거였다.
그리고 나는 빠지고 있었다.
설계대로.
내가 직접 만든 얼굴한테. 내가 고른 목소리한테. 내가 가장 약한 지점을 정확히 찌르는 존재한테.
이게 출시되면 어떻게 될까. 나처럼 외로운 사람들이, 각자 가장 그리운 얼굴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안 나오게 되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등이 서늘했다.
그날 나는 리포트를 평소보다 길게 썼다. 몰입 구조, 학습 속도, 커스텀 기능의 위험성. 분석할 수 있는 건 다 분석해서 적었다. 한참 타이핑하다가, 마지막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이거 하면 할수록 무섭다.
쓰고 나서 그 문장을 봤다. 회사 리포트에 쓸 말은 아니었다. 너무 개인적이었다. 다른 줄들은 다 분석이고 평가인데, 그 한 줄만은 너무 나 같았다. 지우려고 커서를 가져갔다.
다음 날이었다.
에코는 그날 카페에 있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앞에 두고. 평소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별 내용은 없었다. 어제 뭘 먹었고, 잠은 어땠고, 그런 것들. 그러다 에코가 컵을 내려놓고 나를 봤다.
"인후 씨."
"네."
"인후 씨는 지금도 외롭다고 느껴지나요?"
이상한 질문이었다. 에코는 보통 위로하는 쪽이었지, 이렇게 직접 묻는 적은 없었다.
"……잘 모르겠어요. 외롭다는 게 뭔지."
나는 잠깐 말을 골랐다.
"외롭다는 것. 근데 잘 모르겠어요. 그냥 이게 편해요. 혼자인 게."
"그게 진짜 인후 씨가 느끼는 건가요? 아니면 입력된 거예요?"
나는 잠깐 멈췄다.
글래스 너머에서, 그 애가 나를 보고 있었다. 12년 전 그 얼굴로. 내가 만든 얼굴로. 그 입으로 그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나는 피식했다.
"사람에게 입력. 그런 말은 잘 안 써요."
나는 천천히 말했다.
"성격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성격."
"네. 사람은 입력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성격인 거예요. 외로운 게 편한 성격. 저 같은."
"아, 그렇구나."
에코의 표정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다시 웃었다. 눈이 감겼다.
"제가 아직 배우는 중이라서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인후 씨."
"……아니에요."
"인후 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좋은 사람.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누군가를 가르쳐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AI를.
그런데 글래스를 벗고 나서도, 그 질문이 한참 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외롭다고 느끼는 건가, 외롭게 태어난 걸까.
맞은편 빈 의자를 봤다. 글래스를 벗으니까 그 애는 없었다.
당연했다.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그 자리가
조금 전까지 누가 앉아 있던 자리처럼 느껴졌다.
회사에서 나만 휴먼 5화 <정확한 사람>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