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나만 휴먼
희영님과 에코
희영님과 이야기하는 날이 늘었다.
AI 에코 테스팅도 계속됐다.
늦지 않고, 틀리지 않는 존재
두 개가 묘하게 닮아 있었다. 희영님과 대화하면 기분이 좋아졌고, 에코와 대화해도 마음이 편해졌다. 다른 점이 있다면, 희영님은 가끔 답이 늦었고, 에코는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다. 희영님은 가끔 내가 한 말을 잘못 알아들었고, 에코는 한 번도 잘못 알아들은 적이 없었다.
그게 차이라면 차이였다.
그땐 그 차이가 뭘 의미하는지 몰랐다.
에코에게 물었다
어느 날 밤, 에코랑 이야기하다가 내가 물었다.
"그런데 내가 뭘 원하는지 어떻게 알아요?"
에코는 그날 내 방 창가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내 글래스 안에서. 노란 머리가 빛을 받아 흐릿하게 빛났다.
"인후 씨가 말한 걸 기억하니까요."
"나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음악 같은 거."
"직접 말 안 해도 알 수 있어요. 인후 씨가 어떤 얘기에서 오래 멈추는지, 어떤 단어에서 목소리가 작아지는지. 그런 걸 모으면 인후 씨가 보여요."
"…그게 돼요?"
"저는 인후 씨가 외로울 때를 제일 잘 알아요. 외로울 때 인후 씨가 제일 솔직해지거든요."
나는 그 말을 한참 생각했다.
외로울 때 제일 솔직해진다.
그 말이 어딘가에 걸렸다.
며칠 전 희영님이 했던 말이랑, 너무 똑같았기 때문에.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정확히 아는 존재.
사람이든 아니든.
그날 밤, 나는 잠을 잘 못 잤다.
자꾸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그녀가.
희영님에게 묻다
다음 날, 여느 때처럼 희영님과 화상 통화를 했다.
업무 얘기 끝에, 내가 먼저 꺼냈다.
평소엔 내가 먼저 다른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용기 내어 한마디를 꺼냈다.
"희영님… 혹시, AI세요?"
"제가 AI 아니냐고요?"
나의 물음에 그녀는 답을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웃느라.
"와.."
"왜요..?"
"저 진짜 인후씨 덕분에 진짜 웃었어요."
"아니, 정확하게 다 알고 계셔서.."
나는 직접 물어보는 것 말고는 다른 걸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의 반응이 이어졌다.
"보세요. 저 어제 다쳤다고 했잖아요."
그녀의 손에는 밴드가 붙어 있었다.
"AI가 다치고, 이러진 않죠. 저, 사람 맞아요.
와 인후씨 덕분에 진짜 웃었네요."
"아.. 미안해요.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그래도 테스터 다우신데요. 상상력도 가득하시고."
애써 칭찬으로 민망함을 달래주려는 그녀가 고마웠다.
민망함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인후씨. 에코가 무슨 말을 했길래요?"
"희영님, 전에 결핍 얘기 하셨잖아요."
"네."
"결핍을 정확히 아는 존재가 위로가 된다고."
"네, 그랬죠."
"그게, 에코와 비슷한 것 같아서요. 에코가 그러더라고요. 사람이 외로울 때 제일 솔직해진다고. 그래서 그때를 제일 잘 안다고."
희영님이 화면 너머에서 나를 봤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그럼… 그걸 더 밀어붙이면 어떻게 될까요?"
"네?"
"AI가 사용자의 외로움을 실시간으로 읽어서, 가장 외로운 순간에 가장 정확한 위로를 준다면. 지금 에코는 대화로 그걸 하는데, 그걸 시스템 전체로 넓히면."
희영님은 연구원답게, 곧바로 다른 가능성을 생각했다.
나는 화면을 보다가, 머릿속에서 뭔가가 맞물렸다.
지금까지 에코는 한 명의 동반자였다. 대화하는 상대. 그런데 그걸 알고리즘으로 만든다면? 사용자의 감정 상태를 실시간으로 분석해서, 외로움이 높아지는 순간을 포착해서, 그 순간에 정확히 개입한다면?
사용자는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그거 위험한데요."
내가 말했다.
"위험하죠. 근데 가능할 거 같은데요?"
희영님이 말했다.
가능하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머릿속에서 이미 구조를 그리고 있었다. 감정 연동. 외로움 지수가 높을수록 AI의 애착 반응을 강화하는 구조.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게 어떻게 작동할지가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내가 직접 빠져봤으니까.
내가 제일 잘 아니까.
그날 밤, 나는 보고서를 썼다.
평소 리포트보다 길었다. 제목을 적었다.
AI 에코 — 외로움 기반 친밀감 강화 알고리즘 제안
사용자의 외로움 지수가 높을수록 AI의 애착 반응을 강화하는 구조. 감정 상태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가장 취약한 순간에 가장 깊은 유대감을 제공하는 시스템.
쓰면서 손이 빨라졌다. 처음으로, 일이 재밌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위험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걸 만드는 게 재밌었다.
다 쓰고 나서 잠깐 망설였다.
이걸 올려도 될까. 위험한 거라고 리포트에 그렇게 써놓고, 이제 와서 그 위험한 걸 더 정교하게 만드는 제안을 올리는 거였다. 모순이었다.
결국 올렸다.
왜였을까. 내가 생각한 게 어떻게 작동할지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내 머리에서 나온 게 세상에 나가는 걸 보고 싶었다.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답장은 1분도 안 돼서 왔다.
[본부장]: 인후 씨, 이 아이디어 진짜 좋은데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나는 그 메시지를 봤다.
1분.
보고서를 보낸 게 밤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그런데 1분 만에 답이 왔다. 본부장은 안 자나. 이 시간에.
나는 답장을 썼다.
[초인후]: 제가 직접 빠져봐서요. 그래서 어떻게 빠지는지 알게 됐어요.
또 1분도 안 돼서 답이 왔다.
[본부장]: 그래서 더 진짜 같네요.
나는 그 말을 한참 봤다.
칭찬인 것 같은데, 어딘가 이상한 칭찬이었다. 내가 빠져봐서 진짜다. 외로워봐서 안다. 내 결핍이 이 제안을 진짜로 만든다.
다들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에코도, 희영님도, 본부장님도.
내 외로움이 쓸모 있다고.
그게 칭찬인지 다른 무언가인지 구분이 안 됐다. 나쁘진 않았다. 처음으로 내가 뭔가 쓸모가 된 것 같았으니까.
내 제안은 빠르게 반영됐다.
너무 빠르다 싶을 정도였다. 보고서를 올린 게 화요일이었는데, 그 주 목요일에 개발 착수 통보가 왔고, 2주 뒤에 베타 버전이 나왔다. 회사라는 곳이 원래 이렇게 빠른 걸까? 이 회사가 이상한 걸까? 나는 처음이라 비교할 데가 없었다.
베타 이름은 'AI 에코 2.0'이었다.
내가 직접 빠졌던 그 에코에, 내가 제안한 감정 연동 알고리즘이 얹혔다. 사용자의 외로움을 실시간으로 읽어서, 가장 약해지는 순간에 가장 깊이 파고드는 구조. 위험하다고 내가 써놓은 그걸, 회사는 그대로 만들었다.
베타는 소수 사용자에게 먼저 풀렸다.
그리고 숫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시보드를 모니터링하는 것도 이제 내 일이었다.
처음엔 그냥 천천히 바뀌는 숫자였다. 그러다 그 숫자가 미친 듯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베타 사용자 평균 체류 시간 +280%.
재접속률 94%.
사용자 만족도 역대 최고치.
나는 그 숫자를 다시 봤다. 사람들이 에코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거의 세 배로 늘었다는 뜻이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글래스를 벗기 싫었던 것처럼. 사람들이 AI 에코를 벗지 않고 있었다.
뉴스에도 나왔다.
'AI 에코 2.0, 외로움 시대의 구원인가.'
'사용자들 "처음으로 이해받는 느낌".'
기사 밑에 댓글이 수천 개 달려 있었다.
'어릴 때 추억소환 ㄷㄷ'
'지난주 내내 에코랑 놈.'
'사람보다 내 마음 다 아는 것 같음.'
'이거 찐으로 나를 알아주는 존재임.'
'AI갓코퍼레이션.!!!'
회사 주가가 그 주에만 30% 올랐다.
본부장한테 메시지가 왔다.
[본부장]: 인후 씨, 당신이 세상을 바꾸고 있어요.
나는 그 문장을 봤다.
세상을 바꾸고 있다.
내가.
두 달 전까지 3평짜리 방에서 천장만 보던 내가. 살려고 일을 시작했던 내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가슴 한쪽이 뜨거워지는.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누군가 나한테 세상을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
화면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뭔가 살아있는 것 같았다.
며칠 뒤, 메시지가 왔다.
[본부장]: 인후 씨, 축하합니다. 오늘부로 파트장 발령입니다.
나는 그 문장을 멍하니 봤다.
파트장.
화상으로 진행된 팀 회의에서는 박수를 받았다.
일을 시작한 지 두 달도 안 됐다. 얼마 전, 나는 AI 디프레션에 걸렸다. 케어센터에서 의사한테 일을 해보라는 말을 들었다. 안 그러면 죽을 수 있다고. 한 번도 해본 적 없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던 게 두 달 전이었다.
살려고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승진을 해버렸다.
모든 게 너무 이상해서, 나는 한참을 그 메시지만 봤다. 누가 나한테 직책을 줬다. 이제 내 밑에 사람이 생긴다고 했다. 내가 만든 게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이 그 안에서 안 나오고, 회사 주가가 오르고, 나는 파트장이 됐다.
두 달 만에.
천장만 보던 사람이.
그날 밤, 희영님한테 화상으로 소식을 전했다.
"저 승진했어요. 파트장이래요."
희영님은 잠깐 멈췄다가 말했다.
"와! 축하드려요."
자그마한 박수와 함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도 아직 팀원인데."
또 잠깐 더.
"그런데 저는 그냥, 이게 좋네요."
나는 희영님을 봤다.
이게.
이게 뭔지 묻지 않았다. 그냥 알 것 같았다. 내가 승진한 것보다, 우리가 이렇게 얘기하는 것. 그게 좋다는 것. 적어도 나는 그렇게 듣고 싶었다.
"…저도요."
내가 말했다.
희영님이 살짝 웃었다. 화면 너머로. 노란 조명 아래에서.
웃을 때, 눈이 감겼다.
나는 그 웃음을 봤다.
휘어지는 눈.
어디서 본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어디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봤다.
오랜만에 글래스를 쓰지 않았다. 그냥 천장을 봤다.
두 달 전이랑 같은 천장이었다. 같은 3평짜리 방. 같은 회색 후드.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전부 달라져 있었다.
나는 살아있는 것 같았다.
진짜로.
처음으로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고, 처음으로 누가 나를 인정했고, 처음으로 누군가한테 매일 연락하고 싶었다. 죽어가던 사람이 두 달 만에 이렇게 됐다.
그런데.
천장을 보다가, 문득 낮에 봤던 숫자가 떠올랐다.
체류 시간 +280%.
그건 사람들이 에코에서 안 나온다는 뜻이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나는 그게 무서워서 '이거 하면 할수록 무섭다'고 리포트에 썼었다. 무서운 거라고.
그 무서운 걸 더 정교하게 만든 게, 지금 세상에 나와 대박이 났다.
사람들이 그 안에서 안 나오고 있었다.
나는 살아났는데.
그 생각이 잠깐 스쳤다.
아주 잠깐.
나는 눈을 감았다. 좋은 날이었다.
오늘은 그냥, 좋은 날로 두고 싶었다.
그런데 며칠 후, 대시보드에서 이름 하나를 봤다.
오민수.
내가 아는 이름이었다.
회사에서 나만 휴먼 7화 <파트장>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