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안에서 깔깍만 하면 맛있는 음식을 문 앞에서 받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언제부턴가 음식 배달에 일회용품이 따라오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 실제로 언제부턴가 음식 주문 화면의 ‘일회용 수저·포크 안 받기’ 부분이 기본적으로 체크되어 있습니다. 이 작은 변화가 일회용 수저를 한 달 만에 6,500만 개나 줄일 수 있었다는 게 믿겨지시나요?

1. 안 주셔도 돼요
흥미로운 건 그 버튼이 원래부터 있었다는 점이에요. 배달의민족은 2019년 4월, 배달 앱 최초로 ‘일회용 수저·포크 안 주셔도 돼요’ 선택 기능을 만들었습니다.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은 누르면 되는 구조였죠. 2년이 지난 2020년 6월, 그 버튼을 누른 주문의 비율은 15.8%였습니다.
2021년 6월 1일, 배달의민족·요기요·쿠팡이츠 3사가 환경부·녹색연합과 함께 기본값을 바꿉니다. 수저를 주는 것이 기본이던 설정을, 수저를 주지 않는 것이 기본인 쪽으로요. 선택지는 그대로 두고 어느 쪽에 미리 체크해둘지만 바꾼 겁니다.

수저 포크 안 받기
그 한 달 뒤 수치는 이렇습니다. 배달의민족 15.8% → 71.3%, 요기요 13% → 62%, 쿠팡이츠 21% → 76%. 녹색연합은 이 비율로 한 달간 약 6,500만 개의 일회용 수저가 줄었다고 추산했습니다. 전년 같은 달(약 1,498만 건)의 네 배가 넘는 수치고요. 배달의민족은 이후 자체 집계로 일회용 수저·포크 주문이 약 2억 회 줄었고, 업주들이 약 600억 원의 구매 비용을 아꼈다고 밝혔습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고객들의 작은 실천이 이렇게 큰 변화를 만든 것이 정말로 놀랍습니다. 버튼을 만든 것과 기본값을 옮긴 것, 두 조치 사이에 들어간 공수는 거의 차이가 없는데 결과는 네 배 넘게 갈렸으니까요.
2. 그런데 이 방식에는 100년 된 이름이 있습니다

Book of the Month Club
해리 셔먼(Harry Scherman)은 원래 광고 대행사에서 카피를 쓰던 사람이었습니다. 1926년, 그는 맥스 색하임, 로버트 하스와 함께 ‘이달의 책 클럽(Book of the Month Club)’을 엽니다. 구조는 아주 단순했어요. 매달 편집위원이 고른 책 목록을 회원에게 보냅니다. 회원은 회신 카드로 원하는 책을 고르거나, 아니면 거절할 수 있었죠. 문제는 회신을 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답장하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메인 셀렉션’이 배송됐다 — ‘부정 응답(negative response)’ 방식이다.
If they did not reply, they were shipped the Main Selection — a ‘negative response’ system.
– 출처 : Book of the Month, Wikipedia
이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한 줄이 판을 통째로 뒤집었어요. 그 전까지 모든 판매는 고객의 ‘예’를 받아야 성립했습니다. 편지를 보내고, 설득하고, 다시 사게 만드는 일. 셔먼은 그 방향을 정반대로 돌려놓았어요. 거절하지 않으면 그대로 구매가 되도록, 기본값 자체를 판매 쪽으로 옮겨 놓은 거죠. 4,000명으로 시작한 회원은 20년이 채 되지 않아 55만 명을 넘어섭니다.
‘거절 안 하면 구매’로 기본값을 뒤집다
100년 전의 우편 회신 카드와 오늘의 주문 화면 체크박스. 생김새는 전혀 다르지만 작동하는 지점은 같습니다.
3. 미루는 마음을 읽은 설계
이처럼 인간이 기본적으로 결정을 미루고 주어진 상태를 그대로 두려 하는 것을 행동경제학에서는 현상유지 편향(status quo bias)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편향을 이용해 미리 정해둔 선택지로 행동을 이끄는 것을 디폴트 효과라고 부르고요. 이러한 관점을 잘 이용한 것이 위 두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책을 살까 말까’는 은근히 에너지가 드는 결정입니다. 그런데 ‘회신 카드를 굳이 우체통에 넣을까’는 그보다 더 귀찮은 일이죠. 수저나 포크를 받을지는 정하는 버튼도 마찬가지고요. 손가락 한 번 움직이는 일조차 굳이 하지 않습니다. 설득의 문턱보다 행동의 문턱이 더 높았던 셈입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다양한 구독서비스를 첫 달 무료를 써보고 해지해야지 했다가 몇 달치가 빠져나간 뒤에야 알아차린 경험, 아마 다들 한 번쯤 있을 거예요. 해지 버튼은 늘 거기 있었는데 말이죠.
4. 그래서 어디를 바꿔볼 수 있을까요?
그러니 한번 찾아볼 만합니다. 우리가 고객에게 “해주세요”라고 부탁하고 있는 일들 중에, 실은 기본값만 옮기면 되는 것이 있는지를요. 설문 참여, 뉴스레터 수신, 친환경 옵션, 적립 포인트 사용, 정기 점검 신청 같은 것들 말이에요.
다만 한 가지는 구분하고 싶습니다. 이건 고객이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를 떠안기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수저 기본값은 화면에 그대로 보이고, 필요하면 한 번의 터치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숨기지 않았는데도 효과가 났다는 점이 오히려 이 사례의 핵심입니다. 고객이 원하면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상태로 두되,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서로에게 더 나은 쪽이 되도록 미리 맞춰두는 일 그 정도의 설계를 말하는 겁니다.
오늘 저녁에도 누군가는 배달 앱을 켜고 아무것도 누르지 않은 채 결제 버튼을 누를 겁니다. 그 덕분에 일회용 수저 한 벌이 절약되겠죠. 아무도 결심하지 않았는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 서비스에도 그런 자리가 하나쯤 있을지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