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어, 말할 수 있어”

파이롯트 기업PR 신문광고 (2009)
2023-06-19

해당 아티클은 에디터의 브런치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https://brunch.co.kr/@gounsun/23

言えない。
言える。

말할 수 없어.
말할 수 있어.


平井堅(히라이 켄)의 음악을 좋아한다. 남성미 넘치는 서구적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고음의 미성이 오랫동안 귓가에 맴도는 신비한 매력의 가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곡은 아마도 瞳をとじて(눈을 감고서)일 것이다.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애절한 주제가로 한국 가수가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출처: https://www.musicman.co.jp/artist/184508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그의 명곡들 중 나의 최애곡은 Ken’s Bar 앨범에 실린 One Day이다. 쿠와타 밴드의 원곡을 히라이 켄이 리메이크한 곡이다. 히라이 켄 특유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달콤하게 슬픈 곡 분위기도 좋지만,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부분은 바로 이 가사이다.

One day, I found you.

Tonight, I miss you.

단 두 줄의 문장을 던져 놓았는데, 그 안에 수없이 많은 이야기와 감정이 흘러넘친다. 백 명이 들으면 백 가지의 스토리가 생겨난다.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사랑했고, 어떻게 행복했는데, 어떤 일로 헤어졌다는 설명이 필요 없다.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이 가사가 기다려졌고, 이 가사를 들을 때마다 수십, 수백 가지 이야기가 펼쳐졌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더 많은 걸 이야기할 수 있구나. 놀라웠다.

그 놀라움이 이 광고를  펼쳐 보는 순간 다시 찾아왔다. 카피를 읽는데  바로 <One Day>가 떠올랐다.

어딘가, 아니 누군가를 응시하는 소녀의 옆모습. 뒤로 빼 모은 팔과, 앞으로 갈듯 말 듯 망설이는 듯한 다리가 그녀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소녀 앞에 놓인 긴 단어들의 행렬. 자세히 보면 두 문장밖에 없다.  

말할 수 없어.
말할 수 있어. 
말할 수 없어.
말할 수 있어.
말할 수 없어.
말할 수 있어.
말할 수 없어.
말할 수 있어.
말할 수 없어.
말할 수 있어.
말할 수 없어.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사람은 쓰는 거라 생각해.

말할 수 없어, 말할 수 있어. 이 두 문장을 반복했을 뿐인데, 17살 소녀의 설레는 인생의 한 장면이 완벽하게 펼쳐지는 느낌이다. 청춘의 설렘과 사랑의 열병. 그 사람을 언제 처음 봤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어떻게 하고 싶었는지, 왜 못하고 있는지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소녀가 직접 이야기를 해도 이보다 더 아름답게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두 문장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례는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One Day>가 위스키 잔을 들고 듣는 37세의  ‘으른들의’ 러브스토리라면, 이 광고가 버블티를 마시며 보는 17세의  ‘풋풋한’ 청춘 스토리라는 것.

2009년에 발표된 파이롯트 기업PR 인쇄광고 시리즈 중 한편이다. 이 시리즈의 다른 편도 단어와 단어 사이에 강물 같은 이야기를 새겨 넣은 수작이다. 긴 세월 묵묵히 견뎌왔을 것 같은 노인의 뒷모습에, 만년필로 쓴 둣한 느낌의 타이포들이 단정히 자리 잡고 있다. 10개의 동사가 하나씩 쓰여 있다. ‘태어나다’로 시작해서 다시  ‘태어나다’로 끝나는 총 11줄.

태어나다.
울다.
걷다.
웃다.
말하다.
멈춰서다.
외치다.
만나다.
헤어지다.
이어지다.
태어나다.

사람은 인생에서 
몇 글자의 단어를 쓰고 싶어지는 걸까.

단, 10개의 단어로 인생을 그렸는데,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10개의 단어와 단어 사이에 70년의 인생이 흐르고 있다. 성장과 환희와 고통과 사랑이 있다. 거기에, 저 사이에 인생과 역사가 있다. 태어나다로 시작해 다시 태어나다로 끝낸 카피라이터의 섬세한 배치가 돋보인다. 

파이롯트의 이 시리즈는 단어와 단어 사이, 줄과 줄 사이에 수많은 이야기를 넣는 법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늘 더 많이 이야기하려고 한다. 말하지 않으면 모를까 봐. 내 설명이 충분하지 않을까 봐, 또는 오해를 받을까 봐. 그래서 오늘도 기획서에, 메일에, SNS에 쓰고 또 쓰며 설명하고, 덧붙이고, 부연한다.

사실, 우리는 알고 있다. 때로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다만, 실천하지 못할 뿐.


몇 번 안 쓴 브런치 포스트에 벌써 파이롯트의 카피만 세 번째다. 이렇게 꾸준히 아름다운 캠페인을 연이어 내놓는 회사는 흔치 않다. 대행사가 훌륭하거나, 광고주가 수준 높거나, 혹은 둘 다일 것이다. 

정규영의 더 많은 생각이 궁금하다면?

✅ 브런치 https://brunch.co.kr/@goun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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