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나만 휴먼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폰 메모장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았다.
HUMAN_SIM_023.
내가 남긴 한 줄이 그대로 있었다.
022는 준노씨였다.
023은 나였다.
그럼 021은. 020은 뭘까.
번호가 매겨져 있다는 건, 관리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누군가 목록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록 안에, 내가 있었다.
그리고 022였던 준노 씨는 사라졌다.
새벽 한 시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계속 이렇게만 있을 순 없었다.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뭘, 어떻게.
이상한 것들을 하나씩 떠올려봤다.
사라진 준노씨.
그리고 남겨진 023.
사라진 커피 자국.
그리고 자지 않는 회사 사람들.
나는 AI 에코의 테스터였다.
가설을 세우고, 직접 경험하고, 반응을 기록하는 것.
그것을 매일, 매주 리포트로 남기는 것.
내가 해온 일이었다.
이번에는 회사를 테스트해 보기로 했다.
먼저 대상을 정했다.
팀장님을 떠올렸다가 제외했다. 상사한테 새벽에 메일을 보내는 건 그 자체로 특수한 일이었다. 본부장님은 더 안 됐다. 눈에 띄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떠올린 세명의 파트원.
은빈님, 우람님, 우정님.
우리 파트에 있는 사람들이니까, 내가 새벽에 업무 메일을 보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파트장이 급하게 뭘 요청하는 건 일이니까.
그다음은 시간이었다.
새벽 1시는 아직 이르다. 깨어 있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면 답이 와도 이상하지 않다.
새벽 5시나 6시도 안 된다. 일찍 일어난 사람이라고 넘길 수 있다.
그래서 정한 시간.
새벽 3시 40분.
대부분의 사람이 가장 깊게 잠들어 있을 시간. 알람 없이는 쉽게 깨지 않는 시간.
그리고 중요한 건 내용이었다.
모두에게 같은 것을 보내면 안 됐다. 한 명이 답하고 나머지가 복사해서 보낼 수 있으니까. 자동 응답으로 처리될 수 있는 것도 안 됐다. "네, 확인했습니다" 한 줄로 끝나는 요청이면 의미가 없었다.
각자 다른 자료를 열어야 하고, 각자 다르게 생각해야 하고, 최소한 몇십 분은 걸려야 하는 것.
나는 각자에게 맞춰 3개를 만들었다.
은빈님에게는 지난주 사용자 이탈률을 구간별로 재분석해달라고 요청했다. 원본 데이터를 불러와서 직접 계산해야 하는 일이었다.
우람님에게는 다음 분기 테스트 시나리오 초안 검토를 요청했다. 스무 장짜리 문서를 처음부터 읽어야 답할 수 있었다.
우정님에게는 AI 에코 시장 반응에 대한 경쟁사 리포트 요약을 요청했다. 아직 사내에 배포한 적 없는 자료였다.
그렇게 메일 보내기를 눌렀다.
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봤다.
당연히 다음 날 답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새벽 3시 40분에 보낸 메일에 누가 답을 할까. 나는 지금까지의 모든 게 내 착각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알림이 울렸다.
[차은빈] — 3시 41분.
[이우람] — 3시 42분.
[하우정] — 3시 44분.
세 명 모두 답이 도착했다.
나는 폰을 들어 하나씩 열었다.
은빈님은 이탈률을 구간별로 나눠서 분석해 뒀다. 표까지 붙어 있었다. 우람님은 시나리오 초안에 코멘트를 다섯 개 달았다. 페이지 번호까지 정확했다. 우정님은 경쟁사 리포트를 세 문단으로 요약했다.
전부 이상할 만큼 정확했다.
전부 다른 내용이었다.
전부 5분 안에 왔다.
나는 그 세 개의 메일을 읽고 또 읽었다.
사람이 새벽 3시 40분에 깨어 있을 수는 있다. 잠이 없는 사람도 있고, 야행성인 사람도 있으니까. 셋이 모두 다 그럴 수 있는 확률. 낮지만 불가능하진 않다. 그런데 메일을 읽고, 자료를 열고, 분석하고, 표를 만들고, 답장을 쓰는 데 1분, 2분이면 될까.
은빈님이 보낸 표를 다시 봤다. 구간별 이탈률. 이걸 만들려면 원본 데이터를 불러와서, 구간을 나누고, 계산하고, 정리해야 한다. 나였으면 아무리 빨라도 30분은 걸릴 일이었다.
1분. 2분. 4분.
답까지 각자 걸린 시간이었다.
나는 아침까지 잠들지 못했다.
그런데 이걸로 나의 생각을 확정할 수는 없었다.
우연일 수도 있으니까. 하필 그 시간에 셋 다 깨어 있었고, 하필 다들 그 자료를 열어놓고 있었을 수도 있다. 회사가 자동 응답 시스템을 쓰는 걸 수도 있고. 요즘은 AI가 메일 초안도 써주니까, 그런 걸 쓰는 걸 수도 있었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계속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한 번 더 제대로 확인이 필요했다.
이번엔, 우연으로 설명할 수 없는 걸로.
다음 날 오후, 팀 미팅이 잡혀 있었다.
주간 리포트 공유 미팅. 은빈님이 발표를 하는 자리였다.
나는 그 시간을 기다렸다.
2시가 됐다. 화상 미팅이 열렸다. 화면에 네 개의 칸이 떴다. 나, 은빈님, 우람님, 우정님.
"그럼 공유 시작할게요."
은빈님이 화면을 공유했다. 이번 주 사용자 지표. 늘 하던 대로 발표가 시작됐다.
나는 화면을 보면서, 책상 아래에서 폰을 꺼냈다.
손이 조금 떨렸다.
은빈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화면에는 내 얼굴이 보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화면 속에서 내 얼굴이 노트북 아래쪽으로 밀려났다.
들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천천히 움직였다.
내가 아래를 보고 있는 것도, 표정이 굳어 있는 것도.
나는 지금 팀원을 대상으로 테스트를 하는 거다.
이게 걸리면. 숨을 한 번 쉬었다. 어떻게 되지. 잘못 눌렀다고 하면 되나.
이걸 누르면 둘 중 하나였다.
은빈님 폰이 울리고, 발표가 끊기고, "죄송해요 잠깐만요" 하는 것. 그러면 은빈님은 사람이 맞다.
나는 사과하고, 잘못 눌렀다고 하고, 안심하면 된다.
아니면 그것은.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화면 속 은빈님은 계속 발표하고 있었다.
"…이번 주 재접속률은 지난주 대비 5퍼센트 상승했고요."
신호음이 갔다. 한 번. 두 번.
은빈님의 목소리는 끊기지 않았다. 폰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화면 어디에도 진동이나 알림 같은 건 없었다.
"…신규 유입 구간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게—"
세 번.
"네, AI 코퍼레이션 차은빈입니다."
통화 소리가 새지 않도록 한쪽 귀에 꽂아준 이어폰을 귀에서 떼지 못했다.
화면 속 은빈님은 여전히 발표 중이었다. 입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프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구간을 좀 더 보시면요."
그리고 동시에 폰에서 목소리가 났다.
"여보세요? 인후 씨?"
같은 목소리였다.
같은 얼굴이 화면에 있었다. 같은 목소리가 폰에서 나왔다.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화면 속 입은 그래프를 설명하고 있었고, 폰 속 입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인후 씨, 전화 주셨어요? 잘 안 들리세요?"
전화 속 은빈님이 물었다.
동시에, 화면 속 은빈님이 말했다.
"인후 씨, 이 부분 어떻게 보세요?"
두 개의 질문이 동시에 왔다. 같은 목소리로. 다른 내용으로.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화면 속 은빈님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방금 전화를 받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발표하던 사람의 얼굴이었다.
"인후 씨?"
"…아, 네. 죄송해요. 잠깐 생각하느라고요."
화면 속 은빈님이 말했다.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요."
동시에 수화기 속 은빈님이 말했다.
"괜찮으실 때 다시 통화할까요?"
은빈님의 같은 목소리가 스피커와 수화기에서 동시에 나왔다.
하나는 노트북 안에서, 하나는 내 귀 바로 옆에서.
나는 화면 속을 봤다. 우람님과 우정님.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화면을 보고 있었다. 방금 이 방에서 일어난 일을 아무도 모를 테니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 실험을 아는 건 나 하나뿐이었으니까.
미팅이 끝났다. 화면이 하나씩 닫혔다.
나는 그 자리에서 폰을 열었다.
통화 기록을 확인했다.
차은빈. 00:17.
분명 있었다.
내가 방금 들은 목소리는, 기록에도 남아 있었다.
17초.
그 17초 동안 은빈님은 화면에서 발표를 하고 있었고, 동시에 내 전화를 받았다.
헛것이 아니었다.
우연도 아니었다.
새벽 3시 40분의 1분 답장은 우연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아니었다. 한 사람이 같은 시각에 두 곳에서 다른 대화를 하는 건, 어떤 설명으로도 안 됐다.
쌍둥이? 대역? 녹화 영상? AI 자동 응답?
전부 말이 안 됐다. 화면 속 은빈님은 내 질문에 실시간으로 답했다. 전화 속 은빈님도 실시간으로 답했다. 둘 다 나를 인식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사람이라면 불가능했다.
은빈님은 매일 화상으로 보는 사람이다. 말하고, 생각을 나누고, 리포트를 쓴다. 어제도 준노씨 얘기를 물었을 때 괜찮냐고도 했다.
그런데 그 표정도 만들 수 있는 거였다. AI 에코로도.
내가 만든 얼굴이 나한테 웃어줬고, 그게 진짜 같았다. 목소리도, 표정도, 반응 타이밍도 전부 진짜 같았다. 나는 그게 데이터라는 걸 알면서도 빠졌다.
그때 나는 그게 잘 만들어진 제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은빈님은.
우람님은. 우정님은. 팀장님은. 본부장님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달 넘게 이 회사를 다녔다.
그동안 내가 이 회사에서 직접 본 사람이 몇 명이었지.
한 명이었다.
준노씨.
삼각김밥을 먹고, 가끔 회사 욕을 하고, 책상 밑에 숫자 023을 남겨둔 사람.
그리고 준노씨는 사라졌다.
나머지는 전부 화면 속에 있었다. 팀장님도, 본부장님도, 팀원들도. 미팅도, 보고도, 잡담도 전부 화면 너머였다. 그게 정책이었다. 각자의 공간에서 일을 하는 것. 회사에 출근해도 만나는 사람이 없었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람도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같이 타는 사람도 없었다.
다들 각자의 공간에서 일을 하니까. 나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비대면의 시대니까.
그게 아니었다.
각자 다른 공간에 있는 게 아니었다.
이 사람들은 처음부터
화면 안에만 있었다.
회사에서 나만 휴먼.
계속

